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뱅뱅사거리 육교 옆에서

손바닥소설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3. 07:27

본문

 

뱅뱅사거리 육교 옆에서

 

최용현(수필가)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친구 진우한테서 전화가 왔다. 옥천에 있는 설 사장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오면서 전화를 했는데, 강남 멤버들과 송년회 겸 술 한잔 하고 싶다고 하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하고 거기로 오라는 것이다. 뱅뱅사거리 부근에 사무실이 있는 윤호도 오기로 했단다.

   거기란 강남 번화가에서 외곽으로 좀 떨어진 구룡터널 근처에 있는 조그만 룸살롱인데, 재작년 봄에 진우가 첫 테이프를 끊은 이래 강남 쪽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가끔씩 가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곤 하는 아지트이다. 그곳에 들락거리기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그곳엔 40대 초반쯤 되는 주인 마담과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상주하고 있는데, 손님이 많을 때는 밖에서 다른 아가씨를 불러오기도 한다. 강남치고는 팁도 싼 편이고, 비싼 양주 안 시키고 맥주만 시켜도 되고, 노래는 얼마든지 부를 수 있으니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한테 딱 맞는 곳이 아닌가.

   처음엔 진우한테서 저녁에 만나자는 전화가 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았는데, 요즘은 약속이 없을 때는 피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 자꾸 거절하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몇 번 따라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도 하다 보니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도 날아가는 것 같고.

   6시 좀 넘어서 사무실을 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그곳은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지하철을 타고 가기도, 버스를 타고 가기도 애매한 곳이어서 늘 택시를 타고 가곤 했다. 오늘따라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빈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그곳에 도착하니 진우와 설 사장, 윤호가 벌써 와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늘 우리 친구들을 맡아 서빙 하던 아가씨가 눈웃음을 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맥주병들 사이에 양주병도 보였다. 설 사장이 시킨 모양이다. 양주를 시켜서 그런지 오늘은 마담이 손수 만든 닭 날개구이와 새우버터구이까지 안주로 내어왔다.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양주를 맥주에 타서 폭탄주로 마셨더니 금방 취기가 올랐다. 노래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설 사장과 윤호는 계속 앉아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와 진우는 술을 마시면서 교대로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마시게 되나보다.

   여럿이 모인 모임 같은데서 부르면 분위기 깬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발라드도 이곳에서는 눈치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수로 통하는 진우가 김범수의 하루를 부르더니, 다음 곡으로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제곡인 나 가거든을 열창하자, 옆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방에서도 서너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나미의 슬픈 인연으로 시작해서 오늘따라 분위기 있는 여자가수들의 노래만 줄줄이 불렀다. 옆방에서 치는 박수소리에 더욱 용기가 났다.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럼블피쉬의 비와 당신. 이유진의 눈물 한 방울로 사랑은 시작되고를 부를 때는 테이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마담이 쪼르르 뛰어와서 함께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마신다던 윤호가 가장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설 사장이 계산을 하고 대학생 아들에게 얻어준 원룸으로 간다며 방향이 같은 진우와 함께 나갔고,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윤호를 부축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집이 대치동인 윤호가 사무실에 잠깐 들러야 한다며 뱅뱅사거리로 가자고 했다.

   지하철을 한번만 타고 집에 가려면 나도 강남역으로 가야했다. 나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윤호를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택시 안이 따뜻해서 술기운이 더 오르는지 윤호가 창문 쪽으로 픽 쓰러졌다. 뱅뱅사거리 가까이 왔을 때 흔들어 깨워봤으나 영 반응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뒤에서 안고 질질 끌다시피 택시에서 내렸다. 윤호는 인도에 큰 대자로 누워버렸다.

   택시비 계산을 하고 돌아서니 막막했다. 나는 윤호의 코트주머니에서 반쯤 나와 있는 핸드폰부터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문득 아까 술 마시며 윤호가 캐나다에 유학중인 외아들이 방학이라 집에 와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윤호의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뒤져보았다. 다행히 집 전화번호를 찾을 수 있어서 바로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내가 다짜고짜 윤호의 아들이냐?’고 묻자, ‘, 맞는데요.’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 아빠가 술이 취해서 지금 뱅뱅사거리 육교 옆에 쓰러져 있으니 속히 차를 가지고 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강남대로 인도에 드러누워 있는 윤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코에 걸린 안경을 벗겨서 내 손에 쥐었다. 나는 안경을 쥔 손으로 내 어깨에 걸친 가방을 부둥켜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윤호의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살을 에는 찬바람에 몸이 자꾸 오그라들었다. 머리가 얼얼하다 싶더니 콧물이 주르륵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비상등을 켠 채 서더니 젊은 남자가 차에서 나왔다. ‘제가 전화 받은 아들입니다.’ 하면서 그가 차의 뒷문을 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안경을 건네주고 그와 함께 윤호를 뒷자리에 눕혔다. 내가 조심해서 가거라.’ 하고 말하려고 하는데 입이 얼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나도 종종걸음으로 강남역으로 향했다.

   윤호한테서 전화를 받은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이제야 일어났단다. 어제 그곳에서 나와 택시를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뱅뱅사거리에서 큰 대자로 뻗어있었다는 것도 아들한테서 들었단다. ‘너 어제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제?’ 하면서 그가 덧붙여서 한 말이 내 기분을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근데, 너 어제 뱅뱅사거리에 있을 때 혹시 내 버버리목도리 못 봤나?”

 

'손바닥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산아카데미   (0) 2018.12.23
최 씨 vs 강 씨  (0) 2018.12.23
웅계(雄鷄)  (0) 2018.12.23
기타를 든 남자  (0) 2018.12.23
상품권이 뭐기에  (0) 2018.12.23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