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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계(雄鷄)

손바닥소설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3.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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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계(雄鷄)

 

최용현(수필가)

 

   한 문학카페에 연재하는 내 영화에세이에 꾸준히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었다. ‘팔색조라는 닉네임을 쓰는 여자였다. 지난봄, 카페 쪽지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책 한권 보내주겠다고 써서 보냈더니 주소와 핸드폰 번호가 적힌 회신이 왔다. 부산이었다.

   그로부터 2주일쯤 지난 금요일, 학술대회 준비 때문에 경주 한화리조트에 출장을 가면서 문자를 보냈더니 놀랍게도 만나고 싶다며 내일 점심때쯤 경주로 찾아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토요일 아침, 늦게 일어나 어제 회의 때 남은 비스킷으로 조찬을 때우고 체크아웃을 했다. 혼자 보문호수를 걷다가 버스 도착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나갔다. 오랜만에 맘이 설렜다.

   카페에서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160cm를 넘을까 말까한 아담한 체구에 감청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였고, 몸매에 볼륨감이 느껴졌다.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썹, 눈동자가 유난히 까맸는데, 보는 순간 카르멘이 떠올랐다. 돈 호세를 유혹해서 파멸에 이르게 하는.

   택시를 타고 경주에서 꽤 유명한 한식집 요석궁으로 갔다. 복분자도 한 병 시켰다. 정갈한 음식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얘기꽃을 피웠다. 그녀가 덥다며 재킷을 벗었다. 그녀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탱탱한 가슴께의 파진 블라우스 틈을 막고 있은 조그만 단추들이 힘겨워 보였다. 그 쪽에 자꾸 눈이 갔다.

   부산과 울산의 입시학원에서 하는 논술 강의가 주업이고, 전기(傳記)를 대필하는 일도 한단다. 집필중인 전기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요즘 격주로 금요일 밤에 서울에 간단다. 토요일 오전에 만나 구술하는 내용을 녹음하고, 그간 집필한 원고 조율도 한단다. 전기 한 편을 완성하려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정도 걸리는데, 수입도 괜찮고 보람도 느낀단다.

   가족관계를 물어보니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과, 올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서울에 가면 학교 주변에 얻어준 아들 방에서 잔단다.

   그녀가 다음 주 금요일 밤에 서울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전에는 서울에 가면 도니 샘을 만났는데, 요즘은 안 만난단다. 코드가 안 맞는 것 같다나. 도니 샘은 같은 카페에서 활동하는 시인으로 고등학교 영어교사이다. 작년에 카페에서 주관한 문학기행에서 인사를 나눴는데, 알고 보니 대학 후배였다. 가끔 댓글이나 문자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두어 시간쯤 얘기를 나눴을까? 흘러간 명화(名畵)들을 흥미진진한 에세이로 풀어나가는 내 영화칼럼의 팬이 되었다면서 그녀가 오늘은 자신이 꼭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기어코 계산을 했다. 요석궁을 나와서 좀 걷다가 예매한 열차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함께 택시를 탔다. 그녀를 버스터미널에 내려주고 다시 신경주역으로 향했다.

   KTX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쯤 그녀에게서 이런 문자가 왔다. ‘요석궁에서 마주 앉았을 때 그 무릎에 앉아보고 싶었어요.’ 기분이 묘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어젯밤에 샘을 생각하며 남편과 찐하게 했어요. 미안해요.’ 하는 문자를 받았다. 왜 이런 문자를 보냈는지,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금요일 오후, 그녀가 방금 메일을 하나 보냈다고 문자를 보내면서, 오늘밤 9시쯤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KTX를 탈 예정이라며 그 시간에 역에 나와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러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메일을 확인해보았다. 첨부한 파일을 열어보니 이런 글이 나왔다.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습니까.

               "雲母石棺속에 막다아레에나!"

               닭의 벼슬은 心臟우에 피인 꽃이라 구름이 왼통 젖어 흐르나

               막다아레에나의 薔薇 꽃다발.

               傲慢히 휘둘러본 닭아 네 눈에 創生 初年林檎瀟酒한가.

 

               임우 다다른 이 絶頂에서 사랑이 어떻게 兩立하느냐

               해바래기 줄거리로 十字架를 엮어 죽이리로다. 고요히 침묵하는 내 닭을 죽여

               카인의 새빩안 囚衣를 입고 내 이제 호을로 열손까락이 오도도 떤다.

               愛鷄生肝으로 매워오는 頭蓋骨에 맨드램이 만한 벼슬이 하나 그윽히 솟아올라

 

   서정주 시인의 화사집(花蛇集)’에 실린 웅계(雄鷄)’였다. 닭의 교미를 독특한 은유로 표현한 상당히 선정적인 시가 아닌가. 이 시를 읽다가, 몰래 자위행위를 하다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저께 문자에서도 자신에게 도화살(桃花煞)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니. , 정말 색골인가 보구나. 어저께까지만 해도 옳거니(?) 싶었으나, 이젠 은근히 겁이 났다.

   퇴근시간 무렵, 방금 부산역을 출발했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답장으로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려다가 말고 기다리겠다.’고만 써서 보냈다. 도착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 거의 다와 갈 무렵 다시 문자가 왔다. 천안역을 지나고 있다고. 나는 서울역 근처에 괜찮은 주점 한 곳을 봐 두고 KTX 대합실로 올라갔다.

   승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홍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살짝 흔들었다. 함께 걸어 나와 아까 봐둔 주점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오늘 급히 나오느라 샤워를 못했다며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속삭였다. 모텔에 들어가자는 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버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바로 그때 내 핸드폰에서 문자 오는 소리가 났다. 도니 샘이었다.

   ‘선배님, 짚이는 게 있어서 문자 보냅니다. 혹시 팔색조 만나고 있지 않나요? 조심하세요. 색골이에요. 금요일 밤 이 시간쯤이면 올라왔을 텐데, 모텔가자고 할 거예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둘러댔다. ‘와이프 문자예요. 집에 가야겠어요. 장인장모님이 올라오셨다고 빨리 오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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