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찬규의 마음은 오늘따라 더욱 무거웠다. 작년에 아내를 잃고 난 뒤 늘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이제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데, 오늘 윤희를 데리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갈 생각을 하니 또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던 것이다.
주위에선 재혼을 하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아직 그럴 경황이 없었다. 매일 파출부가 와서 집안 청소를 하고 윤희를 보살펴 주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어제 파출부에게 윤희의 입학식에 따라가 달라고 부탁하려다가 그만두었었다.
“아빠, 비와요. 우산 쓰고 갈래요.”
넥타이를 매고 있는 찬규의 등 뒤에서 윤희가 말했다. 목소리가 들떠 있는 것을 보니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집을 나섰다. 오늘 비가 오는 관계로 입학식은 교실에서 한다는 안내판이 교문에 붙어 있었다.
1학년 7반 교실을 찾아 윤희를 들여보냈다. 꼬마들 숫자만큼 되어 보이는 학부형들이 복도에서 교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여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간혹 밖으로 들렸지만 교실 안은 온통 개구리들이 울어대는 무논이었다.
이윽고 입학식이 시작된 듯 각 교실마다 설치된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국가가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교실에 설치된 TV를 통해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할머니는 더러 있어도 남자는 거의 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몇 사람 보이는가 싶더니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복도 저쪽에서 한 여자가 계속 찬규를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그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혹시, 백찬규 씨 아니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경남 밀양에 있는 H중학교에 다닐 때….”
“아! 알겠어요. 남, 남인혜 씨.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네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누가 입학했어요?”
“아들이에요. 찬규 씨는요?”
“저는 딸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 남자애가 뛰어와서 그녀에게 매달렸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9시까지 이 교실로 오라고 하셨어.”
찬규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아드님이 인혜 씨를 많이 닮았군요.”
그때 윤희가 왔다. 그가 윤희를 인사시켜주자, 인혜가 말했다.
“그래, 윤희. 참 예쁘구나, 앞으로 우리 상훈이랑 사이좋게 지내. 응?”
넷이서 함께 운동장을 걸어 나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참, 그 해 여름방학 때 학교에 갔었어요. 인혜 씨도 전학을 가고 없더군요. 가끔 인혜 씨 생각이 나곤 했었소. 언제 전화 한번 주시면….”
학교 앞에서 헤어질 때 찬규가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그날 늦게 회사에 출근한 찬규는 내내 20여 년 전의 기억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인혜는 아련하게 떠오르는 찬규의 첫사랑이었다. 그가 인혜를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읍내에 있는 M중학교에 가지 않고 부산에 있는 좀 괜찮은 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시골에 있는 H중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 곳은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나중에 M중학교로 전학할 요량으로 간 것이었다. 대구에서 온 인혜도 비슷한 이유로 그 학교에 들어와 찬규와 한 반이 되었다.
인혜는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예뻐서 다른 시골 여학생들과는 한눈에 구별이 되었다. 급우들은 물론 2, 3학년 선배들에게도 인혜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찬규와 인혜는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매월 말 성적표를 받으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누가 1등인가 하고.
찬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씩 있는 불교시간이었다. 처음, 담임선생님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손 든 사람이 인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찬규도 재빨리 손을 들었다. 그때부터 불교시간에는 인혜와 함께 교사(校舍) 뒤에 있는 닭장에 사료를 주거나 토끼에게 줄 풀을 베었다.
닭 모이는 인혜가, 풀 베는 일은 찬규가 도맡아 했다. 그 시간이 되면 인혜가 껌을 하나씩 주었다. 껌을 내미는 인혜의 가늘고 하얀 손을 볼 때마다 찬규는 가슴이 설레었다. 인혜가 주는 껌은 며칠씩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다가 포장지가 닳아 헤질 때쯤 꺼내 씹었다. 잘 때는 벽에 붙여놨다가 다음날 또 씹었다.
주산시간이었다. 찬규가 앞에 나가서 숫자를 불러주고 손드는 사람을 한 사람씩 지명해서 답을 확인하는 수업이었다. 찬규는 숫자를 다 불러놓고 인혜가 손들 때를 기다렸다가 계속 인혜만 지명했다. 그 때문에 찬규가 인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다.
그날 찬규는 하교 길에 어느 집 담 밑에서, 2학년 선배한테 아무 이유 없이 얻어맞았다. 그 선배는 ‘앞으로는 인혜에게 말을 걸지 마라.’고 경고하고 사라졌다. 그날 찬규는 그 집 담 밑에서 오래도록 주저앉아 울었다. 그때, 그의 쓰린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그 집 담 너머에서 물씬 풍겨오는 라일락꽃의 진한 향기뿐이었다.
이튿날 불교시간에 인혜와 단둘이 되었을 때, 왜 선배한테 맞았느냐는 인혜의 물음에 찬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은 인혜가 연두색 볼펜을 하나 주었다. 난생 처음 보는 볼펜이었다. 그는 잠잘 때도 그 볼펜을 쥐고 잤다.
5월말이 되었다. 찬규의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전학이 되었으니 6월 1일부터 읍내 M중학교로 등교하라고 하셨다. 담임선생님이 급우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라고 했을 때 찬규는 그저 인혜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그 학교로 찾아갔다가 만난 급우들로부터 인혜가 대구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희의 입학식이 있은 지 며칠 후, 찬규는 인혜의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인혜. 한번 만나 뵈었으면 해요. 오늘 상훈이가 말해줬어요. 윤희에게 엄마가 안 계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