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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사이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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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사이

 

최용현(수필가)

 
   새해 벽두부터 선거얘기가 나오더니 날씨가 좀 따뜻해지고 국회의원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매스컴이나 거리에서나 온통 지역감정이니 낙선운동이니 하는 선거얘기들뿐이다. 내가 사는 여의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생전 보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지하철역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요란한 구호를 외쳐대며 악수공세를 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무렵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있는 고향친구 윤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모시고 있는 어른이 야당 거물 후보와 백중지세인데 조금만 도와주면 틀림없이 당선될 거란다. 그래서 이번 일요일에 경기도 안성에 와서 선거 일을 꼭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인 데다 일요일 새벽에 아파트 앞까지 차로 데리러 온다는 바람에 결국 승낙을 하고 말았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심란했다. 선거판에 끼는 것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아내에게 둘러댈 일도 걱정이었다. 사실 이번 일요일은 내가 결혼한 지 7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아내와 함께 충남 예산에 있는 덕산온천에 가기로 한 터였다.
   그러나 이미 윤호에게 간다고 약속을 했으니 어쩔 것이여! 아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몸으로 하루 때우는 일도 못해주면 나중에 고향에서 윤호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한 사람에겐 못된 놈이 될 것이고 그럴 바엔 아내에게 못된 놈이 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일요일 새벽, 나는 아내 몰래 일어나 집을 나왔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봉고차에 오르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자원봉사자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한 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려 지구당 사무실에 도착했다. 윤호가 반갑게 맞으며 후보자에게 인사를 시켜주었다.
   선거본부가 있는 안성 지구당 사무실은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분위기가 좀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있을 합동유세와 가두방송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유세차를 타고 다니면서 현수막을 운반하고 설치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오전에는 합동유세에 참석했다. 유세가 끝나자마자 빗속에서 가두방송을 강행하였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별 신통찮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했고, 또 모두들 그러는 것 같았다. 저녁 늦게야 봉고차를 타고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올라오는 차안에서 온몸이 오슬오슬 춥고 열도 났다. 낮에 비를 맞은 탓에 감기몸살이 오는 것 같았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아내는 뾰로통해 있었다. 나는 아내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애써 피했다. 그리고 감기몸살 핑계를 대며 얼른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러는 내가 좀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감기약을 사오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몸은 한결 가뿐했다.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부엌에도 없었고, 화장실에도 없었다. 아이들 방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큰 딸 수진이와 작은 딸 은진이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다. 그렇다면 어젯밤에 약 사러 나가면서 밖에서 문을 잠갔고,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인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상가수첩을 뒤져 여의도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한 경찰관이 전화를 받았다. 대뜸 혹시 어젯밤에 여의도에 교통사고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있었다고 했다.
   다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남자냐 여자냐, 어떤 옷을 입었느냐?’ 내가 다시 묻자,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젯밤 1015분경에 30대 중반쯤 되는 여자 한 사람이 OO아파트 앞 횡단보도에서 과속으로 질주하던 시내버스에 치이는 사고가 있었단다.
   피해자는 곧바로 여의도성모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라고 했다. 어쩌면 지금쯤 사망했을 지도 모른단다. 피해자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아직 신원확인이 안되었으며, 키는 160cm가 좀 넘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였다. 키도 맞고, 그러고 보니 아내가 집에서 늘 입던 청바지도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아내가 겨우 36살에, 그것도 결혼 7주년 기념일에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다니.
   아직도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저 어린것들을 데리고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어제 안성에만 가지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내가 결혼기념일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아내가 대신 벌을 받은 것이리라. 이 못난 놈한테 시집 와서 그 동안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이 꿋꿋하게 살아왔는데.
   그때 큰 아이가 막 잠에서 깨어나 아빠 왜 울어? 엄마는?’ 하고 물었다. 나는 네 엄마는 멀리 여행을 떠났다.’고 말하고는 가까이 사는 처형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지금 여의도성모병원으로 가니 와서 아이들을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성모병원은 걸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나는 윗도리만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와 승강기를 탔다. 1층에서 문이 열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승강기 앞에 아줌마 몇 명이 서있었다. 우리 아파트 아래윗집에 사는 아줌마들이었다. 재활용품 분리수거하러 내려갔다가 일을 끝내고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내달았다. 그때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어디 가요? 무슨 일 생겼어요? 옷차림이 왜 그래요?”
   뒤돌아보니 아내였다. 분명 아내였다. 아내가 신문지를 모아두던 빈 종이박스를 들고 서서 아줌마들 틈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내 아래 위를 훑어보니 잠옷 바지에 윗도리만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뒤돌아 와서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승강기 앞에 서있던 동네 아줌마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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