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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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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최용현(수필가)

 

   ‘머리도 식힐 겸 서울에 갑니다. 언제 내려올지 모르니 저를 찾지 마시고 부디 행복하게 사세요.’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집을 나와 어젯밤에 쓴 메모지를 그의 자취방 문틈에 꽂아놓고 곧바로 마산역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3년 전에 서울로 시집간 큰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보러가고 싶다고 했더니 오라고 하면서 서울역에 도착하거든 형부한테 전화해서 퇴근할 때 함께 오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가기 편한 터미널로 가지 않고 마산역으로 갔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열차표는 바로 구할 수 있었다. 10시에 마산역을 출발했다. 오후 4시쯤에 서울역에 도착한단다. 시내를 벗어나니 차창가로 시원한 들판이 보였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집에 갈 때 늘 내리던 밀양역을 그냥 지나치려니 기분이 묘했다. 등골이 휘어지도록 농사일만 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찔끔 났다.

   그 사람의 집은 서울이다. 사당동이라던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일 년쯤 전 마산에서다. 어느 토요일 오후, 여고 때부터 단짝처럼 지내던 회사 친구 윤미가 창원에 있는 오토바이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남친을 만나러 창동으로 가는데 나더러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남친이 친구도 한 사람 데리고 나온다고 했단다.

   그때 따라갔다가 윤미의 남친을 만나고, 함께 온 그의 친구도 소개받았다. 그렇게 해서 일행이 된 네 사람은 함께 오동동으로 가서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해가 질 무렵에는 함께 횟집으로 들어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꽃을 피우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퇴근 무렵, 윤미의 남친이 회사로 전화를 했다. 우리 회사 앞에 와있으니 잠깐 만나자는 거였다. 사실 어제 소개받은 그 사람의 친구는 말 수가 적은 데다 평범한 인상이어서 별다른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윤미의 남친은 여러 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해서 좀 거북했던 기억이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갔더니 그 사람이 나랑 사귀고 싶다고 했다. 나도 그 사람이 싫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윤미 몰래 데이트를 했다. 윤미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만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그런 마음도 차차 사그라져갔다. 그러나 좁은 마산 바닥에서 그런 비밀이 오래 갈 리 없었다. 결국 윤미도 알게 되었고, 윤미와 나 사이는 서먹해지고 말았다. 괴로웠다. 윤미한테 너무 미안했다. 나는 그 사람과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야반도주하듯 자취방을 옮겼다. 회사로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그를 잊으려고 마산 K대 학생들과의 미팅에 자원해서 참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리 동네 어귀에서 술에 잔뜩 취한 그와 마주쳤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가 왜 나를 피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윤미와의 우정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잊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운명의 여자요. 당신이 어디를 가더라도 절대 놓치지 않겠소.”

   며칠 후 점심시간에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회사로 찾아왔다.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우리 회사까지는 오토바이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괴로우면서도 한편 반가웠다. 다시 만남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우리 회사에 다니는 여고 동창들이 내가 윤미의 애인을 가로챘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괴로웠다. 결국 나는 집안에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고 3년여 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짐을 싸서 밀양 집으로 왔다. 집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나자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왔다. 내가 다니던 회사를 찾아가 주소를 알아내어 물어물어 왔다고 했다. 나는 다시 마산에 가겠다고 말하고, 읍내에 간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급히 그를 돌려보냈다.

   다음날, 나는 마산으로 향했다. 다시 취직을 할 생각이었다. 그의 자취방 바로 옆집에 방을 얻었다. 이제 여고 동창들 사이에 내가 그와 동거를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완전히 죽일 년이 되어 있었다. 어저께, 그는 생활비도 줄일 겸 방을 합치자고 했다. 나는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서울에 사는 큰언니에게 의논할 생각이었다.

   기차가 어느새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형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6시까지 광화문 교보빌딩 현관으로 오라고 했다. 시간이 좀 남아서 남대문시장에 갔다. 평일인데도 시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퇴근하는 형부를 만나서 함께 언니 집으로 갔다. 한 동안 언니와 함께 어린 조카를 돌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사흘째 되는 날 언니에게 그 사람 얘기를 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언니는 왜 하필 친구 애인이냐며, ‘괴로우면 서울로 와. 서울에서 취직하면 되지.’ 하고 말했다.

   5일째 되는 날, 나는 점심을 먹고 언니 집을 나섰다. 짐을 싸서 서울로 올 생각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날 배웅한다며 언니도 함께 따라나섰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사람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 놀랍게도 그 사람이었다. 아니,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에?

   셋이서 커피숍에 들어갔다. 서울 간 지 나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어제 막차로 올라왔단다. 나를 찾으러 무작정 서울에 온 것이란다. 어젯밤엔 서울 집에서 자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이곳에 와서 마산행 막차 표를 끊어놓고 대합실에 죽치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했단다. 그가 말했다.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나도 이제 알겠소. 어저께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발령을 내달라고 회사에 말했는데 연말 인사이동 때 보내준다고 했소. 우리 결혼해서 서울에서 삽시다. 이곳에는 당신 여고 동창들도 없을 거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언니가 말했다.

   “같이 내려갈 차표부터 끊으세요.”

   “, . 여기에 꼼짝 말고 계세요. 금방 차표 끊어 올 테니.”

   그가 나가자 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 정도면 됐어! 열정도 있고 박력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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