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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업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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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업

 

최용현(수필가)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말도곤 어려워라

                이후엔 배도 말도 말고 밭갈기만 하더라

 

   우리나라 옛시조이다. 농사일에 싫증이 난 농부가 뱃사공으로 직업을 바꾸었다가 심한 풍랑을 만나 고생한 끝에 배를 팔고 마부(馬夫)가 된다. 그러나 마부 또한 꼬불꼬불한 산길로 말을 몰고 다니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밭을 가는 농부가 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직업에 만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세상에 만족할 만한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밖에서 보기엔 재미있고 근사한 일도 막상 자신이 해보면 또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직업을 영어로는 ‘vocation’ 혹은 ‘calling’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의 부름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소명(召命)을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신인 것은 어딘지 모르게 외경심을 갖게 한다.

   동양에서 직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일천육백 년 전 중국 진()나라 때인데, 황제의 부름을 받은 이밀(李密)이라는 사람이 취업(就業)이라는 말을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역시 부름을 받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늘이 내린 직업이라는 뜻의 천직(天職)도 이와 같은 맥락이리라.

   그런데 또 하나 직업을 뜻하는 영어에 ‘job’이라는 단어가 있다. ‘’ ‘직업등을 의미하는 말인데, 요즘은 이 단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 같다. 이 말은 본래 밥 한 덩어리쯤의 의미로 쓰이던 속어로서 싫어도 참는다.’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직업이란 싫어도 참아야 하는 것인가 보다.

   인내심이 없어서 한 가지 직업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우물을 팔 때도 한 군데를 깊이 파라고 하지 않는가. 이곳저곳 조금씩 파보다가 영영 물을 얻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자기의 적성과 소질에 맞지 않는 직업에 얽매여서 평생을 고민하는 사람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뱃사공이었던 사람이 마부로 직업을 바꾸어서 더욱 빛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기까지엔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업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느끼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하며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곧 직업인의 이상(理想)이 아니겠는가.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천하제일을 지향하는 한 석수장이(石工)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석수장이가 뙤약볕 아래에서 돌을 깨고 있었다. 그 옆으로 임금님의 으리으리한 행차가 지나갔다. 그 행차를 넋 잃고 바라보다가 다시 일을 하던 석수장이는 갑자기 자신의 일이 짜증스러워졌다. 그도 임금이 되고 싶었다. 이 때 하늘에서 임금님이 되어라!(?)’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임금님이 된다.

   임금님이 된 그가 으리으리한 행차를 하던 어느 날, 길가에서 빨갛게 익은 과일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렇구나, 임금도 저 과일 하나 제대로 익게 할 수 없구나. ‘, 태양!’ 그는 다시 태양이 되고 싶어졌다.

   태양이 되고 나니 이번엔 구름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다시 구름이 된다. 구름이 되어 비를 내리니 세상 만물이 다 떠내려가는데 유독 바위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 바위가 나보다 더 강하구나!’ 하고 생각한 그는 다시 바위가 된다. 이번엔 석수장이가 와서 자기를 깨뜨리려고 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석수장이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 사람은 결국 다시 석수장이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젠 임금님의 행차가 그 옆을 지나가도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작위적인 냄새가 다분히 들어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같은 석수장이라 할지라도,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짜증스럽게 일하는 사람과, 자신이 최고라고 믿으며 길이 후세에 남을 유물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일하는 사람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현재의 모습은 같게 보일 수가 있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능력, 성실성 등 여러 가지 변수가 영향을 미쳐 10년이나 20년 후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날 것이다. 아니, 그때도 이들이 같은 모습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연전에, 왕조시대의 제왕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직 대통령 부부가 심산유곡 산사(山寺)로 쫓겨났다. 보도를 통해 산사생활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분노와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서 묘한 기분이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심심산골에서 나물 먹고 물마시며 세상시름 다 잊고 사는 팔자, 딴엔 부럽기도 했는데 권세 맛, 돈맛 다 본 사람들이라 그럴만한 멋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그곳까지 학생 체포대가 따라가서 야단이라고 하니 그럴 경황도 없지 않을까 싶다.

   조선조 시대 스물일곱 분의 왕들 중에는 후세에까지 불명예스런 ()’자를 달고 있는 두 임금이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또 한 사람 그런 패륜 왕 대열에 끼일 뻔한 사람이 있으니 어린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피바람을 뿌리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이다. 산사로 쫓겨 간 그 사람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치세(治世)기간 중의 선정(善政)으로 사후에 세조로 추존을 받았다.

   산사로 쫓겨난 그 사람도 세조가 남긴 역사의 교훈을 본받았어야 했다. 최소한 일가친척의 관리는 제대로 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초지대로 군문(軍門)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 우직한 박력으로 보아 진짜(?) 별 네 개쯤은 달고도 남았을 텐데.

   마지막 직업을 잘못 택한 그 사람은 지금,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고귀한 가치인가를 온몸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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