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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골키퍼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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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골키퍼

 

최용현(수필가)

 

   스포츠에서의 승부는 아무도 모르는 변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스포츠만큼 의외성이 강한 경우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의외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가고, TV중계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승부를 정확히 예단(豫斷) 할 수 있다면 굳이 경기를 지켜볼 필요가 없으리라.

   약팀으로 지목됐던 팀이 강팀을 물리치는 경우 매스컴에서 이변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대부분 전시효과를 염두에 둔 과대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팀이라 할지라도 실력의 100%를 발휘하고 또 강팀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약팀이 능히 강팀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스포츠뿐만 아니라 세상사에 이변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변이란 말속에는 무서운 편견과 선입관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한 경기의 승부를 결정짓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외형적으로 드러난 전력과 정신력, 운 등의 요소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바, 일반적으로 이변이라고 할 때에는 이 요소들 중 하나인 외형적인 전력만을 가지고 판단한 결과이다.

   옛날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초등학교 일 학년 교과서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라면 외형적인 요소만으로도 애초부터 게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승패를 충분히 예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주는 시작이 되었고, 토끼는 저만치 앞서 달리다가 낮잠을 자고.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거북이가 이긴다. 여기서 거북이의 승리를 이변으로 본다면 거북이의 정신력(토끼의 낮잠과 대비해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리라. 스포츠에서 정신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우화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와 유사한 일은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오래전에 있었던, 이변이라면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 축구 경기를 소개해 본다. 프로축구가 생기기 전에 필자가 실제로 보았던 경기이다. 스포츠에서의 의외성을, 한 골키퍼와 사진기자들의 행태에 초점을 맞추어서 기술해 보고자 한다.

   19771115, 한 해의 축구경기를 마무리 짓는, 당시로서는 국내 성인축구대회 중에서 가장 큰 대회였던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군 실업 대학 29개 팀이 출전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한 달 가까이 열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1211일 최종 결승전이 열리게 되었다. 이 경기는 TV로 전국에 생중계 되었고, 양 팀의 관계자와 응원단, 장안의 축구팬들이 스탠드를 가득 메웠다.

   결승전에 진출한 팀은 실업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P팀과 대학세의 마지막 보루 K대 팀이었다. 당시 P팀의 전력은 가히 국내 정상급이었고, 이 팀은 몇 년 뒤 프로팀으로 전환되어 지금도 프로축구의 강자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K대 팀은 창단 후 십여 년 동안 전국대회 우승은커녕, 대학연맹전 우승도 한 번 못해본 중위권 정도의 팀이었다. 실력보다는 계속되는 승운 때문에 결승에 진출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두 팀의 외형적인 전력 차이는 컸다. 특히 P팀은 준결승전에서 대학의 강호 C대를 5 : 0으로 대파하고 결승에 올랐다. 축구에서 5 : 0의 스코어는 엄청난 실력 차이를 뜻하는 것임은 구태여 부연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반면, K대 팀은 준결승에서 H팀과 0 : 0으로 비기고 승부차기로 이겨서 결승에 올랐던 것이다. 누가 보아도 P팀이 두 수 정도는 위였다. 그런 기사가 당시 각 일간지 스포츠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멋있는 골인 장면을 찍으려고 K대 팀 골대 뒤에는 십여 명의 사진기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P팀 골대 뒤에는 사진기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진기자들이 골이 들어갈 확률이 높은 팀의 골대 뒤에 포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공은 K대 팀 문전에서 놀았다. 그러자 P팀의 골대 뒤에 서있던 두세 사람의 기자들마저 K대 팀이 역습을 감행하여 먼저 한 골을 넣었다. 단 한 번의 찬스를 골로 연결시킨 것이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다시 P팀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K대 팀 골키퍼는 신들린 듯 P팀의 강슛을 무수히 막아내었다. 드디어 후반전 중반쯤에 P팀의 열화 같은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K대 팀 골키퍼는 끝까지 선방하여 자신이 지키는 골대 안에 한 골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K대 팀이 2 : 0으로 승리하여 대망의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변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완전한 K대 팀의 승리였다. P팀은 상대를 너무 얕잡아보고 공격일변도로 나가다가 경기내용에선 이기고도 승부에서는 보기 좋게 패했다. K대로선 창단 이후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이었다. 그 결과 이듬해 봄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마라할림컵 대회의 출전 티켓을 따게 되었다.

   다음날, 경기 결과를 보도하는 여러 신문에는 골인장면 사진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사진기자들이 모두 K대 팀 골대 뒤에 있었으니 한 사람도 골인장면을 찍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일의 예측기사는 물론 경기장에서의 사진기자들의 예측포진도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 경기를 시종일관 지켜보면서, 나는 이날의 승부를 좀 색다른 각도에서 진단해 보았다. 혹시 이날의 승부가 K대 팀 골대 뒤에서 골인 장면을 찍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많은 기자들이 K대 팀에 승리를 안겨주는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자신의 바로 뒤에 떼 지어 포진하여 계속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있는 사진기자들을 본 K대팀 골키퍼, 기자들이 자신을 얕잡아 본다고 생각한 나머지 오기(정신력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가 생겨서 그처럼 선전분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오냐 이놈들, 골인장면 어디 한 번 찍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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