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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2. 5. 23.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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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The Lover)

 

최용현(수필가)

 

   1984년, 70세의 프랑스 여류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보낸 여고시절을 회고하는 자서전 형식의 장편소설 ‘연인(L’Amant)’을 발표하여 프랑스 최고 권위의 콩쿠르 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설은 ‘불을 찾아서’(1981년)와 ‘장미의 이름’(1986년), ‘베어’(1988년) 등을 연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프랑스의 장 자크 아노 감독이 1992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에서만 37만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하였다. 원작소설도 엄청나게 팔렸다.

   1929년, 조숙하면서도 감수성이 풍부한 15세의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 扮)는 베트남의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에 있는 고등학교 기숙사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탄 채 배에 승선한다. 버스에서 내린 소녀는 황갈색 원피스에 남자 중절모를 쓰고 배의 난간에 서있다.

   이때 검은색 리무진이 배에 승선하여 버스 뒤에 정차한다. 파리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32세의 중국 청년(양가휘 扮)이 리무진에서 내려 소녀에게로 다가간다. 청년이 ‘모자가 멋져요. 아주 독창적이네요.’ 하고 말을 건네면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배가 메콩 강을 가로질러 선착장에 도착하자, 소녀는 흰 양복을 입은 그 중국 청년과 함께 리무진의 뒷좌석에 앉는다.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하다가 청년이 소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자, 소녀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며칠 후, 중국 청년이 학교 기숙사로 찾아와 소녀를 시장 골목에 있는 어두침침한 독신자의 방으로 데려간다. 소녀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처음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경험한다. 직업이 없는 그는 틈만 나면 기숙사로 찾아와 소녀를 데리고 나가 이제 막 성에 눈뜬 소녀와 함께 육욕(肉慾)을 불태운다.

   방학이 되자, 소녀는 그 청년의 리무진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프랑스인 엄마와 아편에 찌들어 살며 무위도식하는 망나니 오빠, 그리고 오빠의 횡포에 주눅이 든 남동생이 살고 있다. 소녀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오빠와 그런 오빠만 챙기는 엄마에 대한 반항심이 쌓여갈수록 중국 청년과의 성희(性戱)에 몰두한다.

   소녀가 리무진을 타고 온 것을 알게 되면서 중국 청년의 존재가 가족들에게도 알려진다. 가족들은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그 청년을 싫어하는데, 그가 가족들을 고급 음식점에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고, 소녀를 통해 엄마에게 목돈을 쥐어주자 금세 분위기가 호의적으로 바뀐다. 소녀와 그 청년의 밀회가 1년 이상 계속되자, 소녀는 중국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라고 학교에서 소문이 난다. 그러나 소녀는 개의치 않는다.

   이 지역 최대 부호(富豪)의 외아들인 중국 청년은 아편에 중독된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귀고 있는 프랑스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를 꺼낸다. 그러자 아버지는 네가 프랑스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정혼한 중국 처녀와 결혼하지 않으면 유산을 한 푼도 물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청년은 소녀에게 아버지가 정해준 정혼자가 있다고 고백하고, 여태 자신을 만난 것은 돈 때문이라고 말하게 한다. 소녀는 그의 말대로 따라하면서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중국 청년은 소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얼굴도 모르는 중국의 부잣집 처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소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소녀의 가족들은 모두 프랑스로 떠난다. 여객선이 출발할 때, 소녀는 부두 모퉁이에 서있는 리무진 뒷자리에 그가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객선에서, 소녀는 그가 첫사랑이었으며 이제 그를 잃었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오열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에서 성공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그 사람이었다. 부부가 함께 프랑스에 왔다면서, 훌륭한 작가가 된 것을 안다면서, 죽은 남동생을 애도한다면서,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영원히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연인’은 프랑스 감독이 연출한 영어 영화로, 배 위에서 보는 황토색 짙은 메콩 강의 모습과 달리는 리무진의 차창 너머로 보이는 사이공 교외의 광활한 들판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목가적이다. 소설 ‘연인’이 정물화라면 영화 ‘연인’은 풍경화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영화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여인의 흔적과 함께 연애와 결혼에 대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주인공인 10대의 프랑스 소녀와 30대의 중국 청년은 이름이 없다. 소녀나 그녀, 혹은 나로 불리는 여성과 중국 청년이나 중국 남자, 혹은 그로 불리는 남성이 존재할 뿐이다. 굳이 이름을 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성애(性愛) 장면이 대담하고 노출 수위도 상당히 높아서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평단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에서 15살하고도 반년을 더 산 것으로 나오는 제인 마치의 음모(陰毛)가 노출되는 등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지만, 그녀는 1973년생으로 당시 열아홉 살, 우리 나이로는 스무 살이었다. 어려보일 뿐이지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방년 19세에 데뷔작인 ‘연인’을 자신의 인생작으로 만들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제인 마치는 영국인 아버지와 베트남계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영국배우이다. 그녀는 이 영화 이후에도 여러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으나 브루스 윌리스와 공연한 ‘컬러 오브 더 나이트’(1994년) 외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세계 영화계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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