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한국영화는 1960년대 ‘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대표되는 체루성 신파극 시대를 지나, 1970년대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로 대표되는 호스티스영화 시대를 거쳐, 1980년대에는 ‘애마부인’으로 시작되는 에로물 전성시대를 맞게 되었다.
1980년대 초, 제5공화국 군사정권의 출범에 이은 언론 통폐합 등으로 사회분위기가 경직되어가자, 당시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소위 3S(Sports, Sex, Screen) 정책을 펼쳤다. 프로야구 신설, 야간통금 해제와 함께 유흥업소와 극장의 심야영업이 허용되었다.
1982년 2월 6일, 조수비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이 개봉되자,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어 급기야 서울극장 매표소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 영화는 4개월간 31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그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심야극장에 연인들이 많이 들어온 것도 한몫을 했다.
‘애마부인’이란 제목은 말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애마부인(愛馬夫人)’이었으나, 검열에서 제목이 저속하다고 지적되어 ‘말 마(馬)’ 대신 ‘삼 마(麻)’로 바뀌는 바람에 삼베옷을 사랑하는 부인이 되었다.
오수비(안소영 扮)는 사업을 하는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둔, 승마를 즐기는 30대 주부이다. 남편(임동진 扮)은 사업상 바쁘다는 핑계로 늘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거나 새벽에 귀가한다. 수비는 육체적인 허전함을 달래려고 남편에게 추파를 던져보지만, 남편은 도통 반응이 없다. 수비는 자위행위로 성욕을 해소한다.
수비는 남편이 다른 여인과 외도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집에서 심한 부부싸움을 한다. 집을 나온 남편은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옆 테이블의 청년과 시비가 붙는다. 분노를 참지 못한 남편의 주먹에 맞은 청년이 넘어져 뇌진탕으로 죽자, 남편은 과실치사로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어린 딸마저 시부모에게 뺏긴 수비는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아간다. 수비는 시부모 집에 몰래 찾아가 딸을 만나다가 시누이에게 들켜서 딸과 생이별을 하지만, 매주 남편에게 면회를 간다. 남편은 ‘이제 찾아오지 말고 새 출발을 하라.’고 한다. 수비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도예(陶藝)를 하는 총각 동엽(하재영 扮)을 만나게 되고 그의 순수함에 끌리게 된다.
어느 날, 수비는 대학시절의 애인 문호(하명중 扮)를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나는데, 그도 결혼하여 수비가 사는 아파트의 바로 위층에 살고 있었다. 수비가 혼자 사는 것을 알게 된 문호는 밤에 밧줄을 타고 베란다로 내려와 수비와 격정적인 정사를 나눈다. 문호는 계속 수비의 육체를 탐한다.
동엽을 그리워하던 수비는 동엽의 도예 작업장으로 찾아가고, 거기서 동엽과 하룻밤을 보낸다. 수비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시골에 방을 얻어 홀로 살아가는데, 동엽이 그곳으로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은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갈 것이라며 함께 떠나자고 한다.
수비는 동엽이 프랑스로 떠나는 날 남편도 특사로 출감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아침, 수비는 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동엽이 기다리는 공항으로 갈 것인가, 출감하는 남편을 마중하러 교도소로 갈 것인가.
세월이 흐르고, 남편과 재결합한 수비가 사업을 핑계로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과 함께 아옹다옹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안소영은 큰 가슴을 드러낸 채 알몸으로 안장을 얹지 않은 말을 타는 등 야하다고 소문이 났으나 기대만큼 노출신이 많지는 않다. 안소영은 1982년 한 해 동안 ‘산딸기’ ‘암사슴’ ‘탄야’ 등 7편의 에로영화에 출연하여 당시로서는 거금인 5천만 원 이상을 벌었으나, ‘애마부인’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탓에 여배우로서 더 뻗어나지 못했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계속 속편이 쏟아져 나와 순수 비디오용인 13편(1996년)까지 제작되었는데, 작품의 질은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떨어졌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천만 감독이 된 강우석과 강제규가 이 시리즈에서 연출 보조로 영화계에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애마부인’은 여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주인공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 스스로 남자를 선택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 그동안의 욕망과 방황을 접고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여성해방을 다룬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성욕을 적극적으로 표출했기 때문이다.
애마부인의 계보는 1대 안소영에 이어 2대 오수비, 3대는 염해리(김부선의 예명) 등으로 이어졌다. 그 후 영화사와 감독 간에 타이틀 분쟁이 일어나자, 정인엽 감독은 프랑스 로케의 ‘파리 애마’(1988년), 스페인 로케의 ‘집시 애마’(1990년)를 내놓기도 했다. ‘애마부인’의 경쟁영화라 할 수 있는 ‘산딸기’는 1편에서 ‘애마부인’의 두 주역 안소영과 임동진을 픽업하여 상당한 재미를 보았으나 1994년 6편을 끝으로 시리즈의 막을 내렸다.
‘애마부인’을 필두로 1980년대 영화계는 ‘OO부인’ 시리즈가 유행했고, 당시의 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이미숙, 원미경, 이보희를 내세운 수많은 에로물이 등장하였다. 중견 탤런트 고두심이 한 토크쇼에서 과거 ‘애마부인’에 캐스팅 되었으나 대본을 읽어보고 포기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여주인공은 23세의 무명 연극배우 안소영에게 돌아갔다.
2016년 5월, 시리즈가 끝난 지 20년 만에 ‘애마부인 2016’이라는 영화가 새로 나왔다. ‘말을 타면 홀딱 벗은 남자 위에 올라탄 것 같은 느낌이 들어.’라는 자극적인 문구를 내세워 홍보를 했으나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