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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9. 10. 2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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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

 

최용현(수필가)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 제목만 보면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같다. 적군의 용사를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쯤 될 것 같다. 아니다. 이 영화에는 적군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의 적은 놀랍게도 여주인공이 자신의 남편을 지칭한 말이다. 남편과의 잠자리를 ‘적과의 동침’이라고 표현했다.

   웬만한 자극으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세상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차분한 영화를 보면 지루해한다. 이야기의 템포가 빨라야 하고 사건 전개 또한 파격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제목에서부터 강렬한 자극을 구사한다. 원제목을 자구(字句) 그대로 번역한 ‘적과의 동침’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과의 동침’은 낸시 프라이스의 원작소설을 1991년에 조셉 루벤 감독이 영화화한 것으로, 내 이웃 누구의 절박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심정으로 대한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볼만한 영화이다. 극의 흐름에 군더더기가 없고, 면면마다 가슴 조이는 스릴과 서스펜스적인 디테일이 돋보인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로라’ 역을 맡아 어려운 내면연기를 잘 소화해낸 줄리아 로버츠는 로맨틱 코미디 ‘귀여운 여인’(1990년)에서 리처드 기어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면서 단숨에 신데렐라가 된 배우이다. 2000년에는 실존인물을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의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배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여주인공 로라(줄리아 로버츠 扮)는 부자에다 미남인 남편과 함께 바닷가의 한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남편 마틴(패트릭 버긴 扮)은 극도의 결벽증에다 의처증이 있는 이상성격자이다.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여차하면 무자비한 구타를 일삼는다. 건조대 위의 수건은 항상 끝선이 가지런해야 하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섹스도 아주 일방적이다. 오죽하면 적과의 동침이라고 했을까?

   로라는 매일 숨 막히는 생활을 한다. 처음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했지만, 다시 생각을 바꾸고 그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궁리를 한다. 로라는 일주일에 세 번 파트타임으로 도서관에 근무하는 것을 기회로 몰래 수영을 배운다. 언젠가 써먹을 때를 기다리면서….

   어느 날 밤, 이웃집 의사의 제의로 남편과 함께 셋이서 요트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난다.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로라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남편은 경비정을 동원하여 필사적인 수색을 하지만, 로라의 옷이 바다에 떠있는 것을 보고는 익사한 것으로 단정하고 빈 장례를 치른다.

   로라는 어느 조그만 도시에서 이름을 바꾸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웃에 사는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청년 벤(케빈 앤더슨 扮)이 접근해 온다. 아픈 상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았던 로라는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벤에게 차츰 호감을 느끼면서 서서히 행복과 웃음을 찾아간다.

   한편, 남편 마틴은 뒤늦게 아직 로라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어 미친 듯이 로라를 찾아 나서고, 결국 요양소에 있는 로라의 맹인(盲人) 어머니를 교묘하게 속여서 로라의 거처를 알아낸다.

   로라의 집으로 잠입한 남편이, 전에 자주 틀곤 하던 그로테스크한 음률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틀어놓고 숨어서 편집광적(偏執狂的)인 행동을 하자, 로라는 또다시 소름끼치는 공포 속으로 빠져든다. 이때 벤이 나타나지만 남편에게 맞아 쓰러지고 만다. 결국 로라는 남편의 가슴에 총을 쏜다.

   이 영화에서 다룬 주제는 지극히 뻔하다. 현대인들의 이상성격에서 빚어진 가정파탄과, 여기서 벗어나려는 여주인공이 다시 새 생활을 찾는 과정을 통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의 의미를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주제나 줄거리만을 본다면 약간 서스펜스를 가미한 평범한 멜로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로라의 탈출결행, 그녀의 뒤를 쫓는 남편의 집요한 추적, 잠입한 남편의 사이코적인 행동, 막판에 남편의 가슴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 등에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여 관객의 시선을 한 순간도 화면에서 떼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 인물의 성격과 일맥상통하게 설정된 배경도 돋보인다. 남편 마틴의 이기심과 결벽증을 상징하는 해변가의 고립된 저택, 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따뜻한 심성이 잘 드러나 있는 연극무대 등에서 두 사람의 개성이 선명하게 대비(對比)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생활에 회의를 품고 뛰쳐나간 여성의 문제를 다룬 작품은 적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그 동기는 ‘잃었던 자아를 찾기 위해서’라는 공통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가치관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 부분은 저마다 판이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도 결말이 아주 파격적이어서 당혹감과 함께 변화된 세태를 실감하게 된다.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불륜에 빠진 남자에게로 가는 19세기 동명소설 속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고뇌 끝에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지만, 남편의 제자와 바람이 난 1950년대 우리나라 소설 ‘자유부인’의 주인공 ‘오선영’은 결국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에서의 ‘로라’는 전혀 새로운 결말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침입자를 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고는 바로 남편의 가슴에 총을 쏜다. 그것도 네 발이나.

   그것이 여성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겨냥한 계산된 연출이었다 하더라도 그 행위의 책임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로 귀속된다. 영화는 시대의 산물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소감은 한 마디로 이렇다.

   무섭다. 여자들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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