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신세대들은 그들만의 우상을 갖고 있다. 이들은 그 우상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열광한다. 기성세대는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이 바로 우리의 아들딸들이기 때문이다.
1992년 봄, 기존 대중가요와 전혀 다른 노래 한 곡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온통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이다. 이 곡 때문에 우리나라 가요사는 ‘난 알아요’ 이전의 기성세대와 이후의 신세대로 양분된다고 할 정도였다. 서태지는 한 때 젊은이들 사이에 문화대통령으로 불리었다.
이 무렵, 신세대에게는 통쾌함을, 기성세대에게는 아찔함을 느끼게 할 할리우드 영화 한편이 들어왔다. ‘볼륨을 높여라(Pump Up the Volume)’는 그런 의미에서 ‘난 알아요’에 필적될 수 있는 영화이다. 각본을 쓴 앨런 모일이 직접 연출까지 맡은 이 영화는 주인공 크리스찬 슬레이터를 단숨에 10대의 우상으로 올려놓았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파라다이스힐고등학교 학생들은 조금만 잘못을 범해도 퇴학처분을 받는다. 학생들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악랄한 여교장과 그의 추종자인 학생주임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학교 주변에는 밤 10시만 되면 정체불명의 방송이 나온다. 영혼을 흔드는 것 같은 묵직한 저음의 레오나드 코헨의 ‘Everybody Knows’와 함께.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엉터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도, 환경도, 학교도 모두 엉터리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당신의 영혼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는 92FM의 해리입니다.”
학생들은 이 방송을 듣고, 방송내용을 녹음해서 서로 돌려가며 즐긴다. 방송수신이 잘 되는 공터에는 밤마다 젊은이들이 차를 몰고 와서 이 방송을 들으며 열광한다. 방송내용은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로 붙는 등 학교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이 방송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인가?
뉴욕에서 애리조나 주의 교육국장으로 전보된 아버지를 따라 이 학교로 전학 온 작가 지망생 마크(크리스찬 슬레이터 扮)는 극도로 내성적인 학생이다. 아버지가 뉴욕 친구들과 교신하라며 사준 무선통신기가 그의 유일한 친구이다. 마크는 낮에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다가, 밤 10시만 되면 DJ 해리가 되어 무선통신기에 따발총처럼 말들을 쏟아낸다. 어떤 때는 5분 동안, 어떤 때는 5시간 동안.
이 방송은 계속 청취자가 늘어 학생들에게 선풍을 일으킨다. 랩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자신의 거시기(?)가 애기팔뚝만하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또 학생들을 괴롭히는 학생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청취자가 보내오는 고민을 상담해주기도 한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그들의 해법대로 ‘될 대로 되라!’고 말하기도 한다.
해리는 계속 연서(戀書)를 보내오는 노라(사만다 마티스 扮)라는 여학생을 알게 되는데, 노라도 DJ 해리의 정체가 급우인 마크임을 알게 되어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해리는 한 청취자가 보내온 절박한 내용의 편지를 방송한다.
“친애하는 해리! 죽고 싶어요. 난 지금 심각해요. 내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리고 싶어요.”
해리는 그 청취자에게 전화를 건다. 상담 중 전화가 끊어지고, 이튿날 그 학생이 자살한 것이 알려진다. 그날 밤 해리는 자살을 말리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방송을 하다가 ‘우리 모두 미쳐버리자.’라고 한다. 이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미친 듯이 날뛰고, 한 여학생은 위선에 찬 자신을 청산한다며 자기 집에 불을 지른다.
마침내 해리에게 불미스런 사건들의 배후조종자라는 누명이 씌워지고, 그간의 방송내용이 너무 외설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이 해적방송의 존재는 매스컴에 대서특필된다. 학교 당국과 연방통신국, 경찰에서는 해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다. 해리를 쫓는 포위망이 시시각각으로 좁혀진다.
해리는 방송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으나 공터에 구름처럼 모인 학생들을 보고는 마음을 바꾼다. 해리는 방송장비를 차에다 싣고, 그의 정체를 숨겨주다가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노라와 함께 차를 몰고 달리면서 방송을 한다. 공터에서 환호하는 학생들, 해리는 이미 그들의 우상이 되어있었다.
드디어 해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경찰수색대에 완전히 포위된다.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그는 구름처럼 모인 청중들과 매스컴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마지막 방송을 한다.
“여러분! 나는 포위됐어요. 이제 우리들 모두가 나섭시다. 자, 볼륨을 높입시다!”
해리의 방송을 들으려고 운집한 학생들과 무수한 TV카메라 앞에서 해리는 경찰차에 오른다. 그리고 이 학교의 여교장은 공금횡령죄로 고발된다. 해리가 사라지자 미국 전역에서는 하이틴 전용 무선방송이 무더기로 생겨나 방송을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볼륨을 높여라’는 부모와 대화가 단절된 10대들의 고민, 좌절, 사랑 등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무선통신기라는 독특한 매체를 통해 영상에 담은 영화이다.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의 구도이지만 DJ 해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DJ 해리의 아버지가 고위직 교육공무원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조마조마하지만 그래도 뒷맛은 개운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찬 슬레이터는 아역배우 출신으로 ‘장미의 이름’(1986년)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볼륨을 높여라’(1990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 후에도 ‘트루 로맨스’(1993), ‘일급살인’(1995) 등으로 90년대를 풍미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반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