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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마디간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9. 11. 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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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최용현(수필가)

 

   차를 운전하며 장거리 여행을 할 때마다 영화음악 CD를 즐겨 듣는다. 3개짜리 CD에 수록된 60여곡 중에서 첫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이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의 주제곡으로 삽입되면서 빌보드 차트 톱10에까지 올랐던 곡이다.

   ‘엘비라 마디간’은 1889년 6월 20일에 실제로 일어났던 35세 탈영 장교와 21세 서커스단 소녀의 정사(情死)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1967년에 만든 영화로, 우리나라에는 1972년에 개봉되었다. 그해 골든글러브와 미국 뉴욕비평가협회의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여주인공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덴마크의 서커스단에서 외줄을 타는 소녀 엘비라 마디간(피아 데게르마르크 扮)은 스웨덴 순회공연 중에 귀족출신 장교 식스틴 스파레(토미 베르그렌 扮)와 사랑에 빠진다. 부모를 버리고 서커스단을 도망쳐 나온 엘비라는 아내와 두 아이까지 버리고 탈영한 식스틴과 함께 사랑의 도피 길에 오른다.

   두 사람은 세상의 시선과 속박에서 벗어나 덴마크 산속의 조그만 콘도에 숙소를 정하고 한적한 풀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엘비라는 가끔 나무 사이에 줄을 걸어놓고 줄타기를 하는데, 콘도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엘비라 마디간 임을 알아챈다. 두 사람의 도피 행각은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불안해서 멀리 있는 섬으로 숙소를 옮기는데, 식스틴의 친구이면서 같은 부대에 근무하던 동료장교가 일주일을 찾아 헤맸다며 그곳으로 찾아온다. 그 친구는 식스틴의 아내와 두 아이가 처한 암울한 상황을 얘기하면서 함께 돌아가자고 한다. 또 엘비라가 뒤에서 듣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한 여자 때문에 세 사람이 불행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식스틴은 이제 삶의 의미를 찾았고 이것이 내 삶이라며 친구를 돌려보낸다.

   점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두 사람, 돈이 얼마 남았는지 수시로 체크하지만 곧 동전까지 바닥이 나 무일푼이 된다. 탈영한 장교라서 취직을 할 수 없는 식스틴 대신 엘비라가 유흥업소에서 춤추는 일을 해보지만 성희롱에 시달리는 데다, 그렇게 번 일당으로는 두 사람의 하루 빵 값 충당하기도 버거웠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엘비라는 풀숲에서 열매를 따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꽃과 풀을 마구 뜯어먹다가 토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토라진 엘비라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식스틴은 수첩을 찢은 종이에 글씨를 써서 강물에 띄워 보낸다. 엘비라는 강물에 떠내려 오는 종이에 쓰인 ‘용서해줘!’라는 글귀를 보고 뛰어와 식스틴의 품에 안긴다.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고 있음을 자각한다. 엘비라가 ‘이제 방법은 하나예요!’ 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식스틴이 ‘말하지 마!’ 하면서 제지한다.

   식스틴은 이웃사람들과 팔씨름을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한 빵과 와인, 그리고 삶은 계란으로 마지막 피크닉을 준비한다. 두 사람은 콘도의 객실 탁자 위에 엘비라가 아끼던 고급 머리핀을 올려놓고 ‘숙박비 대신 놓고 갑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콘도를 나선다. 식스틴은 콘도 밖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주인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두 사람은 풀밭에 앉아서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 엘비라를 품에 안은 식스틴은 권총을 꺼내 엘비라의 머리를 겨누지만 차마 쏘지는 못한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가고, 엘비라가 나비를 쫓아간다. 엘비라가 두 손으로 나비를 잡는 순간 총소리가 나면서 화면이 멎는다. 잠시 후, 또 한 발의 총성이 들리고,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의 선율이 울려 퍼지면서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날, 먹먹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서 두 정거장을 걸어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영화는 이제껏 살아온 삶을 팽개치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버리면서까지 순수한 사랑만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든 일인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풀밭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자신들의 도피행각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읽으며 킥킥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엘비라를 묘사한 글을 보자. ‘황금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고, 눈에는 열정의 불꽃이, 입술에는 차가운 미소가 함께 했다. 그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보였다.’

   여주인공 피아 데게르마르크는 덴마크 출신의 아버지와 노르웨이 출신 서커스 단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이혼하여 미국인 서커스 단장과 재혼을 했다. 어릴 때부터 줄타기 기예(技藝)를 익힌 피아 데게르마르크는 학교에 다니면서 틈틈이 부모와 함께 구미(歐美)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그러다가 스웨덴 왕립발레학교 학생이던 17살 때,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을 영화화하려고 여주인공을 찾던 스웨덴의 보 비더버그 감독에게 발탁되어 ‘엘비라 마디간’을 찍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을 화해하게 한 강물에 띄운 메시지 장면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당시 모 신발업체에서 CF로 사용하기도 했고, ‘굿바이 마이 프렌드’(1995년)라는 영화에서는 그 장면을 오마주하기도 했다. 이 영화 덕분에 실제 두 사람이 도피하면서 사랑의 밀어를 나눈 숲속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두 사람이 묻힌 묘지에도 관광객들이 찾아와 꽃을 갖다 놓고 간다고 한다.

   지금도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들려오면 연노란 드레스를 입은 엘비라 마디간이 풀밭에서 긴 금발을 날리면서 나비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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