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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9. 11. 2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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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최용현(수필가)

 

   고관대작들의 잔칫집을 드나들며 촌철살인의 해학으로 버무린 외줄타기 공연을 해오던 광대 콤비 장생(감우성 扮)과 공길(이준기 扮)은 온갖 멸시를 받던 그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큰 놀이판을 찾아 한양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한양에서 만난 육갑(유해진 扮)이 이끄는 광대 패와 합친다.

   “개나 소나 입만 열면 왕 얘긴데, 우리도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

   이들은 군중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왕과 그의 애첩을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인다. 공연은 늘 성황을 이루었고, 이들 풍물패는 단숨에 한양의 명물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던 내시감 처선(장항선 扮)이 공연을 보게 되면서 이들은 왕을 희롱한 죄로 의금부로 끌려간다.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던 장생은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한번 웃겨 보겠소!’ 하고 말한다. 그러자 내시감은 ‘만약 왕이 보고도 웃지 않으면 너희들은 모두 목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놀이판을 열어준다. 그런데 막상 왕 앞에서 공연을 하자니 다들 너무 긴장하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왕은 웃기는커녕 아무 표정이 없다.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평소에는 얌전하던 공길이 순발력을 발휘하여 ‘윗입술을 줄까, 아랫입술(?)을 줄까?’ 하며 장생과 야한 유희를 하자, 마침내 왕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왕은 푸짐한 음식을 내리고 궁궐 내에 광대들이 묵을 거처를 마련해 준다.

   궁중광대가 된 이들이 연회장에서 탐관오리를 조롱하는 공연을 하자, 왕은 아주 즐거워하는데 중신들은 모두 바늘방석에 앉은 듯 죽을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또 내시감의 요청으로 궁중여인들의 암투에 휘둘려 왕이 후궁에게 사약을 내리는 경극(京劇)을 공연한다. 이를 지켜보던 왕은 선왕에게 사약을 받은 생모인 폐비 윤 씨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선왕의 두 후궁을 칼로 찔러 죽인다. 말리는 대왕대비를 밀쳐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독자들도 이쯤 되면 이 패악(悖惡)한 왕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연산군(정진영 扮)이다. 그는 아버지 성종에 의해 폐위된 생모의 신원(伸寃)을 모색하려 하다가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광대들을 이용해 자신의 울분을 표출한다. 연산군은 여자보다도 더 예쁜 남자 공길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함께 꼭두각시놀이를 하더니 그에게 벼슬을 내린다.

   공연 때마다 불상사가 일어나자 장생은 궁을 떠나려 하지만,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공길은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광대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중신들은 마침내 이들에게 동물분장을 하게 한 다음, 사냥을 가장하여 이들을 모두 죽이려는 계략을 꾸민다. 사냥터에서 육갑이 중신의 화살에 맞아 희생된다.

   연산군의 관심을 공길에게 빼앗겨버린 애첩 녹수(강성연 扮)도 질투 때문에 공길을 모함한다. 장생은 궁중에 외줄을 걸고 연산군을 빗대 욕하다가 두 눈이 뽑히게 되고, 공길은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장님이 된 장생과 건강을 회복한 공길이 다시 광대의 자리로 돌아오고, 연산군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중신들이 반정을 일으키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이 영화는 화제의 연극 ‘이(爾)’가 원작이다. 어려운 한자 ‘이(爾)’는 ‘너(you) 이’자로 ‘너희’를 뜻하며, 왕이 신하를 부를 때 쓰는 존칭이다. 연극 ‘이’는 연산군에게서 ‘이’로 불리던 광대 공길이 권력의 맛에 취해 동료인 장생, 연산군의 애첩 녹수 등과 갈등을 빚다가 다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그동안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무수히 다루었던 연산군을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하려고 했다. 폭군으로 미리 낙인찍었던 연산군을 이 영화에서는 그의 도착적(倒錯的)인 행태와 함께 그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내면에 깊이 도사린 아픔도 함께 보여주려고 애썼다.

   ‘연산군일기’에 “공길이라는 광대가 왕에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하고 직언을 했다가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공길이 탄생한, 아니 이 영화가 탄생한 문헌적 근거이다. 광대가 왕에게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 아닌가.

   주인공 장생은 허구의 캐릭터이다. 자유혼을 지니고 있는 그는 동료인 공길과 함께 신명나게 놀이판을 벌이는 일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다. 장생은 마지막 줄타기에서 자신이 이 궁의 왕이라고 말한다. 맹인이 되자 전에 줄을 타던 허공이라는 공간이 없어져버리고 하늘과 땅이라는 두 공간만 존재하게 된다. 하늘은 왕이고 땅은 백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맹인이 되어 줄 위에 올라서니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광대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안성에 있는 남사당 ‘바우덕이풍물단’에서 기예(技藝)를 익혔다. 특히 감우성은 자택 마당에 외줄을 걸어놓고 꾸준히 연습을 한데다, 줄타기 세계기록보유자인 권원태 선생에게 사사(師事)한 덕분에 영화촬영 때 대역을 쓰지 않고 5m 상공에 있는 외줄을 능숙하게 탔다.

   이준기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남자인 공길 역을 신들린 듯 해냈고, 육갑 역을 맡은 유해진과 연산군 역을 맡은 정진영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연을 펼쳤다. 그 결과 2006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을 수상했고, ‘실미도’(2003년)에 이어 두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또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왕의 남자’는 미천한 신분이면서도 자유로운 ‘광대’를 내세워 왕과 그의 애첩, 고관대작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희롱하는 신명나는 놀이판을 보여주었다.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그 시절을 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흠뻑 빠져들게 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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