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25살에 죽은 한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흐를 좋아했고, 비틀즈 그리고 저를 사랑했습니다.”
피아노 선율에 담은 메인 테마곡이 애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눈 덮인 스케이트장 옆에 혼자 앉아있는 한 남자가 이렇게 독백을 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결말을 미리 알려준 상태에서, 남자주인공의 회상 형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 스토리(Love Story)’는 1970년 크리스마스 때 개봉되어 ‘러브스토리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업계 9위에서 빌빌하던 파라마운트사는 단숨에 1위로 부상했고, 196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할리우드는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두 주인공이 눈밭에서 뒹굴 때 나오는 곡 ‘눈 장난(Snow Frolic)’은 이 영화를 ‘닥터 지바고’(1965년)와 함께 겨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만들었고, 메인 테마곡과 함께 항상 영화음악의 상위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이 음악을 만든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 프랜시스 레이는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 음악상을 석권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법학도이며 하키 선수인 올리버(라이언 오닐 扮)와 인근 래드클리프 대학의 음악학도인 제니(알리 맥그로우 扮)는 도서관에서 처음 본 순간 서로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대학 내에 가문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잣집 아들과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정에서 자란 총명하고 발랄한 빵집 주인의 딸.
명문가 거부(巨富)인 올리버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는 건 당연지사였고, 매사에 아버지와 코드가 맞지 않았던 올리버는 결국 아버지와 의절(義絶)한다. 주례 없이 신랑신부가 시를 낭송하는 조촐한 셀프 결혼식을 올리면서, 올리버는 휘트먼의 시 ‘Will you give me yourself?’를 제니에게 들려준다.
I give you my love, more precious than money.
(돈보다 더 소중한 내 사랑을 드리겠습니다.)
I give you myself before preaching or law.
(설교나 법률보다 우선 내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Will you give me yourself?
(당신도 당신을 내게 주시겠습니까?)
Will you come travel with me?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 않겠습니까?)
Shall we stick by each other as long as we live?
(우리 살아있는 날까지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허름한 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한 스물네 살 동갑내기들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알콩달콩 살아간다. 그러다가 올리버가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받은 장학금으로 한결 나아진 새집으로 이사한다. 또 변호사가 된 올리버는 유망한 법률회사에 입사하여 이제 안정된 생활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생에 맑은 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올리버 아버지의 회갑연 초대장이 오고, 참석하지 않겠다는 올리버와 말다툼을 벌이던 제니가 집을 뛰쳐나간다. 올리버는 제니를 찾으러 온 동네를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제니가 집 앞에서 울고 있었다. 열쇠가 없어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단다. 올리버가 ‘미안해’라고 하자, 제니가 이렇게 대답한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직역하면 ‘사랑은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어.’쯤 된다.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로, 지금도 사랑의 명구절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말이다.
아이가 생기지 않자, 두 사람은 병원을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한다. 며칠 뒤 결과를 보러 간 올리버는 제니가 백혈병에 걸려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올리버, 앞으로 제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의사는 아파서 입원하기 전까지는 평상시처럼 대해주라고 한다.
제니가 입원하자, 올리버는 그동안 연을 끊고 살던 아버지를 찾아가 제니의 치료비에 충당할 5천 달러를 빌린다. 아버지가 집요하게 용처(用處)를 묻지만 그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제니는 죽음이 임박해오자, 올리버에게 꼭 껴안아달라고 한다.
병원으로 찾아온 올리버의 아버지가 ‘왜 그런 사정을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도와주겠다고 한다. 올리버는 ‘제니는 이미 죽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하자, 올리버는 제니가 했던 그 말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들려준다.
올리버는 제니와 함께 왔던 추억이 남아있는 스케이트장 옆으로 걸어가 앉는다. 메인 테마곡의 애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눈 덮인 스케이트장을 비추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에릭 시걸의 원작 동명소설은 33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2천만 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 이후에도, 제니가 죽은 후 올리버의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쓴 ‘올리버 스토리’를 필두로, 그가 쓴 ‘하버드 동창생’, ‘닥터스’ 등이 모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다.
이 영화의 스토리와 여러 장면들은 그 후의 많은 작품들에서 차용되었다.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집 딸의 연애는 흔한 얘기라 치더라도, 가족의 반대에 부딪친 남녀 주인공이 주례 없이 올리는 셀프 결혼식과, 요즘은 너무 흔해서 진부해져버린, 여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추운 겨울날, 사무실에 조그맣게 켜놓은 라디오에서 ‘Snow Frolic’이 흘러나올 때 창밖을 내다보면 어김없이 흰 눈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면 올리버와 제니가 눈밭을 뒹굴며 뛰놀던 장면이 떠오르고, 젊은 날 눈길을 함께 걷던 사람이 떠올라 가슴이 시려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