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운명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서운 장난을 벌이기도 한다. 때로는 감동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가혹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그 속에 있는 인간은 결코 운명의 변화무쌍한 조화를 알지 못한다.
삼국지를 대표하는 영걸 조조(曹操)와, 조조를 사지(死地)에서 구해주고 후일 조조의 손에 죽는 진궁(陳宮). 이 두 사람의 인연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경우가 아닌가 한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과 각자에게 주어진 길, 그리고 훗날 생사의 기로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인연을 되새겨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쫓기는 신세가 된 청년시절의 조조. 그의 인상이 그려진 몽타주가 전국 각지에 배포되었다. 조조를 사로잡아 오는 사람에게는 만호후(萬戶候)의 직위를, 그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천금의 은상을 주겠다는 포고가 내려졌다.
낙양을 뒤로 하고 남으로 남으로 달아나던 조조, 하남성 중모현 관문에서 불심검문에 걸렸다. 관문병의 대장 진궁은 조조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는 꼼짝없이 쇠사슬에 묶여 다음날 낙양으로 호송될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를 체포한 진궁에겐 만호후의 출세가 보장되었다.
그날 밤, 진궁이 조조의 함거(檻車)로 찾아왔다. 동탁의 전횡에 공분을 느끼고 있던 진궁, 대화를 통해 조조의 인물됨과 우국충정의 마음을 보고 그와 뜻을 같이 하기로 결심한다. 진궁으로서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한 것이다.
“소생도 공직을 버리고 귀공을 따라가겠습니다. 귀공이 의병을 모집하여 동탁을 무찌르는 데 저도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조조의 사슬을 풀어주고 말을 타고 함께 길을 떠났다. 며칠 후 그들은 조조 부친의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들렀다. 여백사는 조조의 몽타주가 곳곳에 붙어 있다며 걱정을 했다. 조조는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함께 온 진궁을 소개했다. 여백사는 부친의 친구답게 ‘힘을 합쳐 큰 뜻을 이루라.’고 격려해주고 술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밤이 되었다. 여백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문득 뒤뜰에서 칼을 가는 소리와 함께 ‘묶어서 잡자니까’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는 겁이 났다. 여백사가 술 핑계로 나가서 밀고하는 사이, 식솔들이 자신을 포박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조조는 곧바로 뛰어나가 뒤뜰에 있는 식구들과 식솔 여덟 명을 단숨에 베어 죽였다. 그 옆을 보니 멧돼지 한 마리가 다리를 꽁꽁 묶인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자신을 대접하려고 멧돼지를 잡으려던 것이었다.
‘아차! 실수를 했구나.’ 조조는 자신의 과오를 알았지만 벌써 말을 타고 내닫고 있었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알게 된 진궁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집을 향해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조조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나귀등에 술병을 매달고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여백사와 마주쳤다. 조조가 황급히 둘러댔다.
“여백사 어른, 낮에 오다가 저기 길목에 귀중한 물건을 두고 온 일이 생각나서 급히 가는 길입니다. 속히 갔다 오겠습니다.”
다시 길을 가던 조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곧 돌아와서 이제 마음이 놓인다며 말했다.
“이젠 됐소. 지금 막 여백사도 한 칼에 베고 왔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도(人道)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깜짝 놀란 진궁이 힐책하자, 조조가 대답했다.
“애석한 일이긴 하지만 만약 그가 집에 갔을 때 그의 처자와 식솔들이 몰살당한 것을 알게 되면 날 죽이려 하지 않겠소? 나는 천하의 만민을 배반할지라도 천하의 만민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게 할 것이오.”
‘무서운 사람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이 사람은 천하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가진 간웅이구나.’ 진궁은 조조를 잘못 판단하고 따라나선 자신의 경솔함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진궁은 얼마 후 슬그머니 조조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몇 년 세월이 흘렀다. 조조는 의병을 일으켜 각지의 군웅들과 함께 동탁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그 동안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자 드디어 때를 만나 황제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하는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다.
진궁은 어찌 되었을까? 조조 곁을 떠나 떠돌아다니던 진궁은 이때 서주성에서 여포의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조조의 군사가 성을 포위하였을 때 진궁은 조조를 단숨에 무너뜨릴 계책을 여포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여포, 처첩의 모함에 빠져 오히려 진궁을 의심하는 등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여포 진영에 내분이 생겼다. 여포는 잠든 사이에 부하 장수들에게 결박이 지워졌고, 진궁도 사로잡혀 여포와 함께 조조 앞에 끌려 나와 무릎을 꿇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진궁은 조조의 생명의 은인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장에서 떠돌아다니기 수 년, 실로 얼마만의 만남이던가. 조조는 단상에서 감회를 억누르며 넌지시 물었다.
“진궁, 오랜만이오. 그래 패장으로서의 감상은 어떻소?”
진궁도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그때 내가 중모현의 관문에서 그를 구해주지 않았던들 오늘의 이 치욕은 없었을 것을. 운명의 장난이란 너무도 가혹하구나.’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했다.
“당신이 보는 대로요. 당신은 지금 우월감에 도취하여 한껏 나를 조롱하고 있구려. 예전의 그 소인배 근성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려. 나는 간웅 조조의 곁을 떠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소. 어서 내 목을 베시오!”
조조는 어떻게든 진궁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진궁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진궁은 스스로 걸어가서 형틀 위에 엎드렸고, 이윽고 형도(刑刀)가 내려쳐졌다.
“오오! 진궁.”
조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조는 목숨을 애걸하는 여포도 참(斬)하고, 진궁의 처자권속을 잘 보살펴주도록 특별히 지시한 후 허도로 개선했다.
두 사람의 운명은 미리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희대의 영웅 조조가 군사 재판정에서 흘린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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