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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별난 두 선비 ‘채옹과 왕윤’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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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별난 두 선비 채옹과 왕윤

 

최용현(수필가)

   

   태평한 세상인 치세(治世)에는 문사들의 재능이 꽃을 피우고 무사들의 무용(武勇)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난세(亂世)가 되면 무력을 가진 군웅들의 세상이 되고 문사들은 군웅들의 휘하에서 지혜와 재주를 빌려주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된다. 문사들의 이름은 그들의 처신 여하에 따라 영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소설 삼국지에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난세를 살아가는 문사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오의 손 씨 정권을 안에서 도운 장소나 장굉 같은 문사가 있는가 하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웅지를 펼치다가 전선에서 죽어간 제갈량이나 방통 같은 문사도 있다. 또 조조를 따르다가 죽임을 당한 순욱이나 공융, 양수 같은 불우한 문사도 있다.

   문사 혹은 선비들이 난세에 어떻게 처신하는가 하는 문제를, 포악한 독재자 동탁에게 스카우트되어 고위직 벼슬을 한 시중(侍中) 채옹과, 동탁을 처단하는 데 앞장선 후한의 충신 사도(司徒) 왕윤의 행적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채옹(蔡邕)은 문장가로 명성이 높은 당대의 석학이다. 일찍이 십상시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파직될 만큼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다. 송곳은 자루 속에 숨어 있어도 그 끝이 밖으로 뾰족하게 나오는 법이다[낭중지추(囊中之錐)]. 덕망 있는 명현(明賢) 채옹이 초야에 은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동탁은 사람을 보내 그를 초빙했다.

   그러나 채옹은 응하지 않았다. 화가 난 동탁이 내 명을 거역하면 일족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마침내 채옹이 동탁의 부름에 응했다. 그에 대한 동탁의 후대는 극진했다. 한 달에 세 번이나 벼슬을 높여주며 그를 시중의 자리에까지 앉히는 등 각별한 대접을 했다.

   본시 힘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름난 학자나 선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집착하는 법이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줄 지식인들로 울타리를 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어용학자들이다. 고려를 뒤엎을 야심을 가진 이성계가 정몽주를 끌어들이려 했고,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수양대군이 성삼문 신숙주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사도 왕윤(王允)은 역적 동탁의 전횡에 비분강개하며 꺼져가는 한의 제실에 충성을 다한 원로대신이다. 청년 조조를 시켜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자신의 수양딸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連環計)를 성공시켜 여포의 손을 빌려 동탁을 처단한 강골의 문사이다.

   동탁이 여포에게 주살되자, 대권은 동탁을 제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도 왕윤에게 돌아갔다. 왕윤은 동탁 사후의 뒷마무리를 진두지휘했다. 먼저 동탁에게 온갖 못된 지혜를 내준 모사 이유를 목 벤 다음, 미오성에 있는 동탁의 친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와 양곡을 모두 거두어들여 나라에 귀속시켰다.

   그런 다음 왕윤은 문무백관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고 한실(漢室)의 회복을 자축했다. 그때, 동탁의 시신 앞에서 시중 채옹이 엎드려서 목 놓아 울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채옹을 잡아들인 왕윤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너는 어찌하여 역적이 죽었는데 한의 신하로서 기뻐하기는커녕 울고 있었느냐? 그러고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자신이 모시던 분일지라도 동탁의 시신 앞에서 통곡했다는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고위공직자로서 정치 감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필부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용기를 발휘했음에 틀림없다. 충성을 하다가도 죽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버리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채옹은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한때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그의 참혹한 최후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적을 섬겨 국사를 그르치게 한 죄 죽어 마땅하오나, 바라건대 조금만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셔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한사(漢史)’ 집필을 마치게 해주십시오.”

   충심이 담겨있는 간청이었다. 죽이기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태부 마일제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모두 그의 재주도 아깝지만 그는 효행이 지극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죽였다가 새 조정이 인망을 잃을까 두렵다고 하면서 그를 살리려 애썼으나 왕윤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효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고 사기를 쓰게 했더니 오히려 비방하는 글을 남겨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소. 더구나 지금처럼 어지러운 시기에 간사한 신하로 하여금 어린 임금 좌우에서 붓끝을 놀리게 한다면 반드시 우리들을 비방하는 글을 남길 것이오.”

   그리고는 기어이 채옹을 죽였다. 왕윤이 너무나도 독선적이고 지나친 처사라는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굳이 채옹을 죽인 것은 어용학자로 이미 낙인이 찍힌 채옹이 집필하는 한사에 자신을 비방하는 글을 남길까봐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채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비들은 채옹이 동탁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도 옳지 않지만, 왕윤이 채옹을 죽인 것도 지나친 처사라고 비판하며 애석해했다. 마일제는 대신들에게 기강을 바로 잡고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나라의 근간인데 그런 것을 지키지 않고서 어찌 오래갈 수 있겠소?’ 하며 왕윤의 집권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왕윤은 동탁의 부하 장수인 이각과 곽사가 항복을 청해왔을 때 잘 다독이지 않고 강경하게 처신하다가 궁지에 몰린 그들이 다시 군사를 모아 쳐들어왔을 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절대 권력자의 유고라는 혼란기에 국정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지만 그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마저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난세를 살아가던 별난 두 선비, 둘 다 의()를 중하게 생각한 당대 최고의 문사였지만, 한 사람은 개인적인 의리를 중시한 어용학자로 살다가 죽었고, 또 한 사람은 사회적인 정의를 중시한 강골의 문사로 살다가 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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