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버지와 아들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3:05

본문


아버지와 아들

 

최용현(수필가)

 

   “주택가 골목길이나 공원의 보안등(保安燈) 교체작업, 그런 일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 제가 회사를 맡으면 대기업은 몰라도 장래성 있는 중소기업으로 키울 자신이 있어요.”

   “뭐라, 네가 전도유망한 중소기업으로 키우겠다고?”

   개봉동에서 조그만 전기설비회사를 운영하는 장인호 사장, 줄줄이 딸만 다섯을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 아들이 1년 전에 대학을 나오고도 아직 취직을 못하고 빈둥거리고 있다. 그래서 한번 떠보려고 네가 회사를 맡아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인데 이놈의 대답이 이러니 허풍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대견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버지, 보안등 공사는 관공서에서 수주(受注)를 해서 하는 일이니 안정성은 있지만 발전성은 없어요. 요즘은 인터넷 시대잖아요. 인터넷을 통해 재개발 지역이나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의 전기설비 입찰에 적극 참여해서 공사를 따내면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아들의 말이 영 허풍 같지만은 않았다. 이놈이 내가 준 카드를 가지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술이나 마시고 계집 꽁무니만 쫓아다닌 줄만 알았더니 사업 얘기를 제법 진지하게 하는 것을 보니 이제 철이 좀 들었나 싶어 흐뭇하기도 했다.

   이놈이 그동안 놀기만 한 게 아니고, 아버지 회사 생각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이 때다 싶었는지 아들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아버지, 내일부터 아버지 회사에 출근할게요. 이제 쉬시고 저한테 한번 맡겨보세요. 전봇대에도 올라갈 거예요.”

   장 사장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20여 년 동안 전봇대에 올라 다닌 베테랑이다. 전봇대 위에서 전구 갈아 끼우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전봇대 사이의 전선을 교체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전봇대에 올라가는 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나도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교체하다가 몇 번이나 떨어질 뻔했다. 특히 삭은 전선을 교체하는 일은 아주 위험해.”

   “그런 단순노동은 몇 번만 해보면 금방 할 수 있어요.”

   장 사장은 아들이 전봇대 올라가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같아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모처럼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 해보겠다는데 초장부터 너무 기를 꺾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나이가 어느새 칠순이 다 되어 가니 은퇴할 때도 되었지 않았는가.

   작년 봄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했을 때 장 사장은 극구 만류했었다. 그래도 4년제 대학의 전기공학과를 나왔으니 괜찮은 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졸업 후 1년이 지나도록 취직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적당한 기회에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로 했는데, 오늘 드디어 그 결심이 선 것이다.

   장 사장은 일주일 동안 회사에 나가 아들에게 업무를 가르치고 인수인계를 했다. 그리고 소신껏 해보라고 격려하면서 아들이 불편해 할 것 같아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아들 녀석이 제대로 하나 싶어 궁금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났지만, 일단 맡긴 만큼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다시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오후, 송 기사로부터 한번 나오시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지 않아도 회사가 잘 돌아가는지, 또 함께 일하던 인부들은 잘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아들은 공사 입찰하는 데 가고 사무실엔 송 기사와 경리사원만 남아 있었다. 회사 근처 순대국밥 집에 들어갔다. 송 기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장님, 아니 회장님! 저 이번 달까지만 하고 회사 그만 두겠습니다. 젊은 사장님이 공사 현장에는 안 따라다니시고 공사 입찰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데다 아버지 또래의 인부들한테 막말을 하고, 운영비를 절감한다면서 인부들 점심도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시니, 그래서 인부들도 모두 이번 달까지만 나오고 그만둔답니다.”

   “알았네, 송 기사. 내가 알아서 해결 할 테니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말게.”

   다음날, 장 사장은 아들이 출근할 때 함께 따라나섰다. 일기예보에서 아침에 영하 14도까지 떨어진다더니 몹시 추웠다.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귓불이 떨어져 나갈 듯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송 기사가 인부들과 함께 전선과 공구를 차에 싣고 있었다. 오늘은 고척근린공원의 낡은 전선을 교체하는 날이다. 장 사장은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갈 테니 오늘은 너도 현장에 따라가자.”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다. 작업복 위에 두터운 잠바를 껴입어도 엄청 추웠다. 차 위에서 인부가 전선을 집어 주면 다음 인부가 받아서 전봇대 중간에 있는 아들에게 전해주고 마지막에 송 기사가 받아서 마무리작업을 하는 것이다. 올라오던 전선이 갑자기 멈춰 섰다. 힘에 겨워서 아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뭐해! 빨리 전선 안올리고.”

   장 사장이 뒤에서 소리치자, 찔끔한 아들이 다시 허리를 숙이며 전선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해서 다음 전봇대로, 그 다음 전봇대로 작업이 이어졌다. 정오가 지나자 아들이 자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 사장이 아들의 속을 꿰뚫어보듯 다시 다그쳤다.

   “, 배고프지? 그렇다고 자꾸 시계만 쳐다보면 어떡해?”

   아들은 대답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후 한 시가 넘어서야 한 구역의 전선 올리는 작업이 끝이 났다. 이제 오래된 선을 걷어내고 새로 올린 전선을 연결부위에 이으면 된다. 장 사장은 고개를 들어 해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아들에게 말했다.

   “힘들지? 춥고 배도 고프고? 저 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점심 먹고 할까? 아니면 일 다 끝내놓고 점심 먹을까?”

   장사장이 마치 네 속을 안다는 듯이 말하자, 아들이 총알처럼 대답했다.

   “, 아버지! 배고파 죽겠어요. 점심 먹고 해요.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나왔어요.”

   그때서야 장 사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거봐라! 네가 직접 밖에 나와서 일을 해봐야 저 분들이 추운데 얼마나 고생하는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팀워크를 다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에세이 및 콩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기(傳記)와 전기(電氣)  (0) 2018.12.22
어떤 노인의 절규  (0) 2018.12.22
구로동 별곡  (0) 2018.12.22
신세대 신입회원  (0) 2018.12.22
어떤 황태  (0) 2018.12.2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