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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황태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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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황태

 

최용현(수필가)

 

   잡지사 편집부장직을 그만두고 두 달째 집에서 놀고 있던 지난 10월 말, 학회 사무국장으로 있는 한 친구로부터 취업 자리를 소개하는 전화가 왔다.

   “학회 비슷한 곳의 사무국장 자리야, 학회 근무경력이 있고 글 잘 쓰는 사람을 찾는다기에 너를 추천했어. K대 황O영 교수 앞으로 네 이력서를 팩스로 보내 봐. 그 학회 부회장이야. , 노파심에서 얘기하는 건데, 그 사람 개성이 아주 강하니까. 가급적이면 부딪치지 마.”

   “, 알았어. 고마워.”

   이력서를 팩스로 보낸 지 하루 만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과총회관에 있는 사무국으로 찾아갔다. 그 단체의 회장과 황 부회장이 함께 나와 있었다. 집기비품을 새로 들여와서 그런지 사무실이 아주 깔끔했다. 2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여직원 한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과학기술자를 발굴하여 널리 알리는 일을 하며 최근에 과기부에 설립등기 신청을 했는데, 정식 명칭은 우리과학기술찾고알리기모임이란다. 줄여서 우리과학이라고 하기로 했단다. 다른 학회와 업무가 비슷하지만 과학자들의 전기(傳記) 발간업무가 많아 글 잘 쓰는 사람이 필요하단다. 학회에서 4년 동안 근무했던 경력과 수필가인 점이 마음에 든단다.

   111일부터 출근을 했다.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부터 근무하고 있던 미스 임과 번갈아가며 해당기관을 쫓아다니면서 학회 운영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필요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임원등기, 사업자등록, 출판등록, 회비 청구, 지로신청.

   두 번째 목요일, 내일 있을 이사회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황 부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스 임을 퇴근시키고 나서 자기에게 전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미스 임이 퇴근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올 연말에 미스 임을 퇴직시키고 내년부터는 나 혼자 근무를 하라며 내년도 예산안에서 여직원 인건비는 빼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재정이 어렵더라도 설립할 때부터 고생한 여직원을 그렇게 내보내는 것은 곤란하지 않느냐, 제 인건비를 줄여서라도 같이 근무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 우체국과 은행에도 가야하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해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안 된다며 그렇게 예산안을 짜라고 강압적으로 말하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나는 가급적이면 그 사람과 부딪치지 말라고 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 입만 열었다 하면 잘난 체 하고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고, 회의에서도 다른 사람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혼자서 결론을 내리는 사람으로 유명하다며 회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하고 회장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황 부회장이 내년도 예산에서 여직원 인건비를 빼고 나 혼자 근무를 하라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그 사람은 외부에서 돈을 많이 끌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회장단에 넣은 사람이라며, 자신이 책임지겠으니 여직원 인건비를 예산안에 그대로 책정하라고 했다.

   이사회가 열리기 한 시간쯤 전에 회장이 왔고 얼마 후에 황 부회장이 왔다. 나는 내년도 예산안을 복사해서 두 사람에게 주었다. 예산안을 찬찬히 훑어보던 황 부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무국장! 여직원 인건비를 빼라고 했는데 왜 넣었어?”

   미스 임이 옆에 있는 데도 그는 큰 소리로 내게 힐문했다. 그의 음성이 격앙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눈치를 챈 미스 임이 밖으로 나갔다.

   “, 회장님과 상의를 했는데 일단 넣으라고 말씀하셔서 넣었습니다.”

   그 때 회장이 나서서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그 문제는 말이오. 총무이사가 이사회 때 해결책을 마련해 오기로 했소. 그래서 내가 일단 넣으라고 했소.”

   그러나 그는 회장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분명히 빼라고 지시를 했는데도 사무국장이 회장 말만 듣고 넣었으니 자기를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여직원을 계속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체면과 위신이 깎인 데 대해 계속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분개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예산안을 탁자 위에 팽개치고는 그럼 난 안 해! 난 빠질 테니까 두 사람이 어디 마음대로 잘 해봐.’ 하면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그날 이사회에서 여직원은 총무이사가 재직하고 있는 연구소에서 당분간 인건비를 보조해주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 부회장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사회가 끝나고 이사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 회장과 단 둘이 남았을 때 나는 저 때문에 회장님과 부회장님 두 분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고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무국장, 아까 황 부회장이 하던 말은 다 잊어버리세요. 그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니 괘념치 마시고 근무하세요.”

   그 후 황 부회장으로부터는 전화 한 통 없었다. 다시 한 달이 지났다. 12월 이사회 때가 되어, 이사회 참석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이사회 때도 오지 않았다.

   다시 해가 바뀌고 1월이 되었다. 1월 이사회 때도 그는 오지 않았다. 1월 마지막 날 퇴근시간 무렵, 아무 예고 없이 회장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날 불러서 옆에 앉히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국장, 황 부회장이 학회 일에 완전히 손을 떼겠다며 협조를 안 해주고 있어요. 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학회 재정이 어렵게 될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사무국장이 여기를 떠나주셔야 할. 미안합니다.”

   어이가 없었다. 황 부회장이 학회일 협조를 미끼로 회장을 협박하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도 느껴졌다.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나는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회장의 간곡한 청을 마다하고 나는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렇게 황당하게 퇴직하는 게 황태(황퇴)구나 생각하니 나도 몰래 쓴웃음이 나왔다. 첫 출근한 지 꼭 석 달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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