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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傳記)와 전기(電氣)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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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傳記)와 전기(電氣)

 

최용현(수필가)

 

   첫 직장인 OO생명에 공채로 입사한지 35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하니 바로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영업소에서 한 달 마감을 해보니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했다. 빚을 내서라도 상부에서 제시하는 실적을 채우며 버텨나가야 할지, 아니면 사표를 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할지.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3년여 동안 근무했던 본사 교육부에 인사를 하러 갔다. 거기서 인사담당 이사로부터 자회사인 OO문고에 보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 달 마감하면서 겪은 일들 때문에 회사에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파란만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 22층 건물을 걸어 나왔다. 그때가 31살이었다.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 결혼을 해서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었지만, 첫 직장에 너무 쉽게 들어간 탓인지 그만두는 것도 쉬웠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딱 일 년만 쉬면서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이나 실컷 읽다가 다시 시험을 쳐서 회사에 들어가야지.

   OO생명에 다니는 동안 매월 발간되는 사보에 인간의 편린(片鱗)’이란 제목으로 고정칼럼을 연재했었다. 그 칼럼 덕분에 나는 일약 회사 내의 명사(名士)가 되었고, 말단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사장실의 호출을 받아 사장님의 원고를 대필해주기도 했다. 그런 일들로 인해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지만, 내 빈약한 독서량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퇴직금 봉투를 들고 OO문고로 가서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역사 서적들을 전집으로 구입했다. 대세계사(15권), 한국의 역사(13권), 왕비열전(10권), 1공화국(10권)과 세계단편문학전집(10권) 등. 또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삼국지는 모종강본과 길천영치본의 두 가지 판본을 샀고, 단행본들도 잔뜩 구입했다

   아내에게 문방구를 차려주고 집에 틀어박혀서 책에 파묻혀 살다보니 금방 1년이 지나갔다. 다시 취업하려고 알아보니 신입사원으로의 응시는 나이 때문에 아예 불가능했고, 간부사원으로 응시하려고 하니 보험회사 간부는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보험회사는 영업만 잘 하면 마구잡이로 승진을 시켜주기 때문이란다. 당당히 승진시험을 거쳐 대리로 승진했는데.

   눈높이를 좀 낮춰서 중소기업의 사원모집 신문광고에 눈을 돌렸다. 홍보직이나 관리직을 뽑는다고 해서 가보면 대부분 영업직이거나 다단계 회사였다. 일정금액을 투자하면 소정의 투자익금을 월급에 보태주겠다는, 희한한 조건을 내세우는 회사도 있었다.

   그렇게 소득 없는 헛걸음을 계속하면서 나는 세상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체험으로 알아갔다. 그러던 백수 4년차의 2월 중순 어느 날, 신문 하단에 난 조그만 직원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 모집인원 : O

       - 응시자격 : 4년제 대졸, 35세 이하

       - 제출서류 : 이력서, 자기소개서,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교수추천서

       - 선출방법 : 서류전형 및 필기시험(영어, 한문)

 

   회사 이름이 사단법인 대한전기학회였다. 뭐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위인들의 업적을 연구하여 전기(傳記)를 발간하는 단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고 싶었다. 나이는 운 좋게 35세 커트라인에 딱 걸렸는데 교수추천서가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7년 동안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았는데 어느 교수님을 찾아가 추천서를 부탁해야 할지.

   나는 담배 한 보루를 사들고 무작정 학교로 갔다. 일단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은 다음, 학교 다닐 적에 4년 동안 들락거렸던 행정학과 사무실로 갔다. 마침 우리 대학 출신 선배이신 Y교수님이 계셨다. 인사를 드렸더니 단박에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셨다. 학과장을 맡고 있단다.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선뜻 추천서를 써주셨다.

   등기우편으로 응시서류를 보냈다. 며칠 있으니 서류심사에 합격했으니 필기시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아직도 책장에 꽂혀있던 대학 때의 교양과목인 영어 교재와 한문 교재를 찾아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뒤적거려보았으나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기시험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에 내려서 국기원사거리에서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니 과학기술회관이라고 쓰인 건물이 나왔다. 그 건물 5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 여직원이 회의실로 안내해주었다. 커다란 원탁 테이블이 있었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열 대여섯 명 정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도 빈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되자,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시험지를 들고 들어왔다. 그 학회 사무국장이란다. ‘대한전기학회는 전기공학을 전공했거나 전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학술단체이고, 사무국은 학회지와 논문지를 발간하고 학술행사를 준비하는 등 회원들 뒷바라지하는 일을 한단다. 과장급 중간간부 한 사람을 뽑는데, 오늘 17명이 왔으니 경쟁률이 171이란다.

   아, 잘못 짚었구나. 아까 올 때 정문 기둥에 과학기술회관이라고 써진 것을 보고 대한전기학회가 위인 전기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전깃불과 관련된 전기(電氣)를 연구하는 학회구나 싶었는데 그게 들어맞은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수학과 과학 과목을 싫어해서 그 전기가 아니길 바랐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시험이 시작되었다. 영어시험에는 긴 영어문단과 함께 독해력을 테스트하는 문제가 있었고, 간단한 회화 문제도 있었다. 한문시험은 어려운 한문 단어를 써놓고 한글로 독음을 달게 하거나, 그 반대로 쉬운 한글 단어를 써놓고 한문으로 쓰라는 문제도 있었다. 시험을 포기하고 중간에 나가버리는 응시자도 몇 명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앉아서 문제와 씨름했다.

   다음날 오전, 그 학회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합격을 축하한다며 31일부터 출근하란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허공으로 주먹 어퍼컷을 날렸다. 백수 4년 만에 전기장이로 변신한 내 중년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까 생각하니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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