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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주를 구합니다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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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주를 구합니다

 

최용현(수필가)

 

   ‘한 달에 250만원 달라고 해야지.’

   임 실장의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로 가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임 실장은 우리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중개를 해준 부동산 사무실의 직원인데, 그가 근무하는 부동산 사무실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어서 기회가 있으면 다른 데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그 부동산 사무실에 놀러 갔을 때 내가 무슨 얘기 끝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하자 임 실장은 정색을 하며 말했었다.

   “최 형, 자격증이 있으면서 취직은 왜 하려고 하세요? 부동산 사무실을 차리세요.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수입이 월급쟁이보다는 훨씬 나아요.”

   “돈이 문제죠. 서울에서 부동산 사무실을 하나 차리려면 억이 든다고 하던데 그만한 돈이 있어야죠.”

내가 반문하자, 그는 물주(物主) 한 사람을 구하면 된다고 했다. 물주는 자기가 구할 테니 자기와 함께 셋이서 멋지게 해보자면서 물주를 구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나더러 그동안 부동산중개업협회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받아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허가가 난단다.

   어저께 임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물주를 구했고, 그 사람과 함께 강서구 가양동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상가에 가서 괜찮은 자리까지 계약을 했단다. 보증금과 권리금으로 17천만 원이 들었단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임 실장과 둘이서 근무하고, 내게는 자격증을 빌려주는 대가로 월 50만원을 주겠다고 하는데 나더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난주에 3일간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격증만 빌려주면 불법일 뿐 아니라, 사업자등록증이 내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다른 곳에 취직도 할 수 없으니 나도 함께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 실장은 다시 그 사람과 의논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셋이 만나서 결정을 하자고 전화가 온 것이다.

   약속한 다방에 들어서니 임 실장과 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물주일 터이다. 임 실장이 그 사람 한 사장을 소개했다. 단단한 체구에 구릿빛 얼굴, 어딘지 모르게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린 40대 후반으로 임 실장과 비슷했다.

   어릴 때 서울에 와서 막노동, 트럭운전사, 야채장사, 슈퍼마켓 등 안 해본 것이 없단다. 최근에 광명시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돈을 좀 벌었는데 이젠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슈퍼마켓을 정리하고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단다.

   이번 토요일 잔금을 치르고 그 사무실을 인수한단다.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아는 사람도 있지만 임 실장이 아주 적극적으로 추천을 해서 나를 택했단다. 한 사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대우를 해주면 좋겠는지 말씀해 보세요.”

   나는 올 때 마음먹은 대로 말했다.

   “전 자격증만 있지 실무경험은 없어요, 하지만 배운다는 자세로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같이 근무하는 조건으로 월 250만 원 정도는 받았으면 해요.”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한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처음 3개월간은 150만원, 4개월째부터는 250만원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우리 사무실의 대표이시니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근무하시고요.”

   “좋습니다.”

   나는 대뜸 시원하게 대답했다. 토요일부터 10시까지 출근하기로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동안 나는 임 실장이 적어주는 대로 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토요일 아침, 10시쯤 출근을 하니 한 사장과 임 실장이 먼저 나와서 책상과 응접세트, 집기비품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나는 판촉물 초안과 세 사람의 명함 도안을 인쇄소에 맡겼다. 모레 월요일 오전에 서류를 들고 강서구청에 가서 허가신청을 하기로 했다.

   임 실장이 부동산 매매계약서 용지를 한 묶음씩 나눠주었다. 그런데 한 사장이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숫자를 한문으로 써야 된다던데 난 한문을 못 써요. 그래서 계약서가 필요 없어요.”

   한 사장의 예기치 않은 말 때문에 임 실장이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계약서 쓰는 거 별것 아니에요. 한글로 써도 돼요. 안 그러면 숫자만 한문으로 쓰면 되는데, 필요한 글자는 제가 써드릴 테니 하루에 몇 번씩만 연습하세요.”

   나는 백지 한 장을 꺼내 상단에다 한문으로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壹 貳 參 四 五 六 七 八 九 拾 佰 阡 萬 億. 다 쓴 종이를 한 사장에게 내미려고 하는 순간, 한 사장이 또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난 무식해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내 학력의 전부요. 그래서 나는 사무실에 나와서 청소나 하고, 손님 모시고 집이나 보여줄 생각인데 내가 꼭 계약서를 써야 됩니까?”

   “……….”

   그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계속 마음이 찜찜했다. 계약서를 못 쓴다고 해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한 사장이 그렇게 짜증을 낼 줄이야. 조금만 연습을 하면 되는데 자신의 학력에 대한 플렉스를 그렇게 표출하다니.

   다음날, 아침을 먹고 TV를 보고 있는데 한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 가까이 커피숍에 와있다며 잠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커피숍은 한산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한 사장이 미안한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 한 잠도 못 잤어요.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 최 사장님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해요. 그동안 교육도 받으시고 했으니 성의만 조금 표시할게요.”

   한 마디로 해고통보였다.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앞으로 잘 되길 빈다고 덧붙이면서 일어섰다. 봉투는 안 받으려고 했으나 그가 한사코 따라오며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와 헤어져 우리 아파트로 걸어오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출근 하루 만에 해고라, 정말 기네스에 오를 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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