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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서워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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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서워

 

최용현(수필가)

 

   아침에 눈을 뜨니 아랫배가 묵직했다. 뱃속에 가스가 꽉 찬 것 같았다. 현관에 있는 신문을 주워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며칠 계속 변비증세가 있더니 사흘째 볼일을 보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려가며 10여 분 동안 실랑이를 한 끝에 겨우 성공을 했는데, 이어서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변기통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겁이 덜컥 났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확실하게 파악하려면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며 입원을 하란다. 아내가 입원수속을 밟는 동안 복부 초음파검사를 했다. 별 이상이 없는 것 같단다. 오늘 밤에 속을 다 비우고 내일 대장 내시경을 하자면서 몇 가지 약을 주었다. 피도 뽑았다, 피검사 결과는 이틀 후에 나온단다.

   점심 때 쯤 다시 화장실을 가니 이번엔 설사가 쏟아졌다. 피도 좀 섞여 나왔다. 병원에서의 첫날 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4년 전에 대장암으로 죽은 영호 생각이 났다. 증세도 영호와 비슷한 것 같았다.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변비에다 설사, 그리고 혈변까지.

   영호는 대학에서 만난 같은 과 친구였다.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2년 동안 친하게 지냈다. 나는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를 했고 그는 ROTC에 지원했다. 내가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3학년에 복학할 무렵 그는 아직도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내가 졸업 후 Y철강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영업부에 배치되었을 때, 그는 작년 6월말에 전역하여 우리 회사 자재부에 입사해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회사에 근무하게 된 것은 우연이기도 하지만 둘 다 금속공학과를 나왔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우리의 인연은 또다시 이어졌다.

   그에게는 전에 없던 기벽(奇癖)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매일 퇴근길에 지하철역 근처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왜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혼자서 소주를 마시느냐고 물었더니 군대생활 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란다. 뱃속이 비면 늘 속이 아리고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데 소주를 마시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싹 가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했더니 작년에 전역하자마자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용종만 2개 뗐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다보니 어쩌다 한 번씩 만나기는 해도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왔다. 하루 일을 마치고 회사에 들어와 서류정리를 하고 있는데 영호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호가 3일 전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거였다. 퇴근길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영호는 링거액을 꽂은 채 잠이 들어있었고 그의 아내가 그 옆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의 아내를 복도로 불러내서 물어보았다. 며칠 동안 계속 혈변을 쏟더란다. 부랴부랴 입원해서 사진을 찍고 검사를 했단다. 어제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대장암 말기란다. 암세포가 대장은 물론 소장, 직장에까지 퍼져서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란다. 길어야 6개월, 아니면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단다. 이럴 수가.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영호가 링거액을 꽂은 채 내 손을 잡았다.

   “윤섭아, 나 이제 끝났나봐. 4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빈속에 소주를 마셨는데, 그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내년 봄에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데 그 집에서 하룻밤만 자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어. 윤섭이 넌 절대로 술 많이 먹지 마라.”

   그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의지가 있어야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하면서 힘을 내라고 말했다. 그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일 내로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병실을 나왔다.

   몇 번 더 그를 찾아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입원한 지 3개월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는 완전히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수척해 있었다. 교사인 그의 아내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포기한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영호보다 그의 아내가 더 안쓰러웠다. 나는 오늘밤은 내가 병실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그의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내가 돌아가자 영호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밤이 무서워!’ 낮에는 사람들이 있고 또 통증이 심하다고 하면 의사가 와서 진통제 주사도 놓아주는데 밤에 모두들 잠들고 나면 혼자 깨어있단다.

   “그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어린 시절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들 생각도 나고,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꿈도 자주 꿔.”

   결국 그는 입원한 지 4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리고 고향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가 간 지 4년이 지났다. 나는 지난봄에 영업과장을 끝으로 Y철강을 그만두고 철강관련 사업체를 차렸다. 회사에서 알게 된 인맥 덕분에 사업은 그럭저럭 잘 되었지만, 그동안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밤늦게까지 술 마시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이 불편했다. 그러더니 결국 혈변을 쏟고.

   다음날, 수면으로 대장 내시경을 했다. 결과는 내일 피검사 결과와 함께 나온단다. 입원한 지 이틀째 밤이 되었다. 또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은 영호의 증상과 내 증상이 똑같은 것 같다. 그렇다면 대장암? 남은 시간은 3개월에서 6개월? 밤이 무섭다던 영호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거의 뜬눈으로 병원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내고, 드디어 검사결과가 나오는 운명의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자꾸만 벽에 걸린 시계에 눈이 갔다. 나도 모르게 의사의 출근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 10시가 가까워오자 담당의사가 우리 병실에 들어왔다. 그 의사가 차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치질입니다. 치질에는 내치와 외치가 있는데 선생님은 내치입니다. 내치는 속에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가끔 배변 시에 혈관이 터져서 혈변이 나오게 됩니다. 간단한 수술로 깨끗이 없앨 수 있습니다. 2~3일만 입원하면 됩니다.”

   “? 치질이라고요? 히히히 고맙습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실성한 사람처럼 자꾸 히히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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