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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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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최용현(수필가)

 

   “병욱 씨, 저 명희예요. 기억하시겠어요?”

   미스 박이 건네준 전화를 받은 김병욱 대리는 명희라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오랜만에 들어본 명희의 음성은 약간 가라앉아 있었고 왠지 좀 낯설게 느껴졌다. 서양 물을 먹어서 그렇겠지.

   “명희, 오랜만이네. 파리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왔어?”

   “어제 귀국했어요. 바쁘지 않으시면 오늘 저녁에 좀 뵈었으면 해요. 제가 회사 근처로 찾아갈게요. 세종호텔 커피숍에서 7시 어때요?”

   “, 그러지.”

   그가 얼떨결에 대답을 하자, 명희가 저녁에 봬요.’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예기치 않은 명희의 전화는 그의 정신을 온통 흩트려 놓았다.

   한 때 그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명희,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자였다. 새삼스럽게 옛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보니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아내에게 외식도 시켜주고 백화점에서 옷도 한 벌 사주기로 아침에 약속을 했는데.

   결혼 후 4년 동안 그가 아내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년 전에 딱 한 번 대학동창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는 친구가 전화로 알려줘서 그날 저녁에 케이크를 사들고 간 적은 있었다. 올 봄 들어 아내가 옷 한 벌 사달라고 보채기에 생일 때 선물로 사주겠노라고 미리 약속을 했던 터였다.

   명희와 아내는 불문학과 동기생으로 둘 다 그가 군복무를 마치고 3학년에 복학했을 때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였다. 셋 다 같은 학년이었지만 두 여자는 복학생인 그를 형으로 부르며 잘 따랐다. 그러던 것이 4학년이 되자 묘한 삼각관계로 발전되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지금의 아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그를 쫓아다녔고 그는 지금의 아내보다 명희를 더 좋아했다. 현모양처 타입인 아내보다는 늘씬한 키에 톡톡 튀는 개성을 지닌 명희에게 마음이 더 쏠렸던 것이다. 동아리 내에서도 남학생들 사이에 소피 마르소라 불리던 명희의 인기가 더 좋았다.

   가을이 되어 졸업 기념으로 설악산에 단체로 등산여행을 갔을 때 그는 명희와 첫 키스를 나누었다. 그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의 아내는 저돌적으로 육탄공세를 펼쳤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명희에게로 향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아내의 치밀한 작전이었음은 후일 아이를 낳고서야 알게 되었다.

   졸업하자마자, 임신한 아내 측의 성화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며칠 전, 명희가 회사로 찾아왔다. 유학을 간다고 했다. ‘행복을 빌게요.’ 하며 떠나는 명희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혼자 눈시울을 붉혔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무렵, 명희가 사무실로 엽서를 보내왔었다. ‘파리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고, 또 아내의 안부도 물었기에 아내에게도 보여주었다. 아내도 반가워 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오히려 둘이 편지를 주고받지 않느냐는 의심만 사게 되었다. 요즘도 아내는 어쩌다 명희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곤 한다.

   본래 균형 잡힌 몸매에 세련되고 지적인 매력을 지녔던 명희, 이제 파리패션까지 섭렵했을 테니 더 멋진 모습으로 변해있지 않겠는가. 그 모습을 상상하니 다시 그리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게다가 명희와의 관계는 막 피어오르다가 아내의 훼방으로 억울하게 끝나버리지 않았던가!

   그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오늘 저녁엔 아내를 못나오게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갑자기 야근할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고 우리 약속은 내일로 미루자고 말했다. 입에 발린 거짓말임에도 홀딱 속아 넘어가는 아내의 미련함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그는 급한 서류만 대충 처리해 놓고 4층 휴게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창가에 앉아 혼자 명희와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동아리 MT때 둘만 빠져 나와 별을 바라보며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던 일, 카페에서 둘이 위스키를 마시다 술이 취해 오바이트하는 명희를 업고 나와 택시를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던 일, 그때 그녀를 부축하면서 느꼈던 볼륨감, 나긋나긋했던 허리, 그녀를 둘러업으면서 손에 느껴졌던 탱탱했던 둔부의 양감, 그리고 설악산에서의 짜릿했던 첫 키스.

   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녁에 만나면 2층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여 근사하게 저녁을 먹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가리라. 방에 들어서자마자 허리가 으스러질 만큼 껴안고 키스를 하리라. 샤워를 마친 명희가 타월을 걸치고 섹시한 포즈로 내 앞에 나타나겠지. 타월이 스르르 흘러내리면서.

   그는 퇴근시간보다 좀 일찍 사무실을 나와 지하 이발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머리를 간단히 손질하고 약속시간 5분전에 이발소를 나왔다. 세종호텔 커피숍에 들어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쪽에서 한 여자가 일어서더니 웃으며 걸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그의 아내가 아닌가. 하얗게 질린 그는 갑자기 발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애써 침착한 척하고 태연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여기 웬일이야?”

   아내는 실실 웃으며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어서 나갑시다. 김병욱 선생님! 아무리 기다려도 정명희는 이 자리에 안 나타나요.”

   “……….”

   어안이 벙벙해서 서있는 그를 아내가 밖으로 밀쳐냈다. 호텔 현관을 나서자마자 아내의 직격탄이 날아들었다.

   “, 야근한다고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마누라 생일보다 옛날 애인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 이거죠? 프랑스에 있는 명희가 당신을 왜 찾아와요? 그 전화 내 친구 경림이가 한 건데 그것도 모르고 홀딱 넘어가 정신을 못 차리다니. 명희 고년 목소리도 구별 못해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아내의 뒤를 따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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