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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사이클 경연대회에서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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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사이클 경연대회에서

 

최용현(수필가)

 

   “의정부영업국 리라사원 강범식, 생년월일은 1955627일입니다.”

   “,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950분까지 본사 5층 강당에 도착하도록 안내해주십시오.”

   그는 전화를 끊으려다, 갑자기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무엇이 있어 다시 물었다.

   “, 그 사람 남자입니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그의 직감과 일치했다.

   “아니, 여자입니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시작하는 라이프사이클(Life Cycle) 경연대회 참가자 명단을 받던 OO생명보험 교육부에 근무하는 서른한 살 노총각사원 나영수 씨, 여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틀림없다. 의정부이고 1955년생이라면.

   그의 뇌리는 7년 전으로 급히 내다르고 있었다. 나영수 씨가 그 여자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대학 1학년 첫 미팅 때 만난 파트너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남자 같은 그 이름 때문이었다.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부잣집 외동딸처럼 귀티 나는 얼굴에다, 유난히 뽀얀 피부, 맑고 큰 눈. 다들 그더러 퀸카를 잡았다고 부러워했었다. 작년에 의정부여고를 졸업했고,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딸 넷 중에서 막내인데 고추(?) 달고 나오길 바라는 아버지께서 미리 범식이라고 남자 이름을 지었단다.

   영화얘기를 많이 나누어서 그런지, 그녀가 갑자기 영화 보러 가자고 했다. 버스를 타고 종로로 나갔었다. 아마 빠삐용이었을 게다. 서너 시간 후에 시작하는 표만 있었다. 극장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암표상이었다. 그녀는 암표라도 사서 지금 바로 들어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날 그는 정상요금의 두 배에 달하는 암표를 사기 위해 호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을 투자했다.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하숙집밖에 몰랐던 그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서 하숙비와 용돈을 꼬박꼬박 부쳐 주시는 부모님의 노고를 결코 잊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극장을 나와서 애프터 약속도 없이 헤어졌다. 그는 차비가 없어서 5km가 넘는 하숙집까지 혼자 걸어오면서 아무 죄 없는 그녀를 괜히 욕했다. 고약한 년! 나한테 바가지 씌우고.

   한 달쯤 지난 어느 일요일 오후, 하숙집 마당 수돗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빵 봉지를 들고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미팅을 주선했던 친구를 통해 주소를 알아내서 물어물어 왔다고 했다. 그날, 차비가 없어서 하숙집까지 걸어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너무 미안해서 찾아왔단다.

   그녀는 빨래를 해주겠다며 그더러 방에 가서 빵을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사코 말리는 그를 방으로 밀어 넣고 빨래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속옷까지. 그날은 영 딴 사람 같았다. 처음 만났던 날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마치 쓸개 빠진 사람처럼 그녀가 들고 온 빵을 먹으며 감동도 함께 삼키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만났다. 만나보니 그렇게 고약한 여자는 아니었다. 1학년 마치고 군대 간다고 했더니 꼭 편지하라고 하면서 그녀의 집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의정부 어디였다. 훈련소에 있을 때 한 번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 여자가 의정부영업국의 리라사원이라, ‘리라사원이란 ‘Life Lady’의 앞 글자 ‘Li-La’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 여사원을 중점 육성, 직장을 방문하여 보험을 모집할 수 있도록 정예화 시킨 생명보험 설계사를 이르는 말이다. 일반 직원들은 대부분 한 달 수입이 몇 십만 원이지만, 우수한 리라사원은 대부분 백만 원이 넘는다.

   그는 그날 밤새 뒤척였다. 스물일곱 살이겠구나. 어떻게 변했을까? 결혼은 했을까?

   다음날 아침, 그는 출근하자마자 5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전국 각지에서 영업국 대표로 온 설계사들이 대회장에 모여들고 있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모두들 나누어준 라이프사이클 용지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책상을 돌며 참가자들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나누어준 라이프사이클 용지를 작성하느라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지만 틀림없었다. 뽀얀 피부와 큰 눈도 그대로이고, 이목구비의 선이 약간 굵어진 것 외에는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12시에 대회가 끝났다. 그가 다가갔다.

   “강범식 씨, 혹시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그녀가 흠칫 놀라며 더듬거렸다.

   “어마, 나영.”

   “, 나영수입니다.”

   “안녕하셨어요? 우리 회사에 다니시는 군요, 교육부에 계세요?”

   “, 작년에 졸업하고 곧장 우리 회사에 입사했죠.”

   점심시간이라, 함께 나가 음식점에서 마주 앉았다. 7년 만이었다.

   “훈련소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왜 답장을 하지 않았어요?”

   그가 묻자, 그녀는 의아한 듯이 반문했다.

   “아니,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냈어요. 좀 늦게 보냈는데 못 받아 보셨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 그랬군요. 훈련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배치가 되는데, 자대(自隊)로 간 이후에 편지가 도착한 모양입니다. 답장이 오지 않으니 다시 편지 쓸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그더러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무역회사에 계속 다니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 두고 몇 개월 쉬었다가, 3년 전에 우리 회사에 리라사원으로 들어왔단다. 수입도 괜찮고 시간도 좋아 아주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결혼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오후,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책상 앞에서 계속 멍하니 앉아있었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요동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의정부영업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그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잘 가셨나요? 조만간에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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