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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술 상무의 일과표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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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술 상무의 일과표

 

최용현(수필가)

 

   “이런 회사가 또 있겠어?”

   그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회사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업무는 오전이면 끝나고, 오후에는 바이어들 접대를 하는데, 그건 요정이나 룸살롱에 가서 술 마시는 일이란다. 쌈박한 호스티스들을 불러놓고 최고급 양주에다, 흥이 나면 밴드도 부른단다. 술값은 모두 회사에서 지불해주니 이런 직장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는 외모도 닮은 데다 노래 실력까지 탁월해서 조용필이라 불리던 친구로, 복학 후에 만나 3년 동안 같은 학과를 다니며 친하게 지냈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OO생명보험에 함께 응시했다가 나는 합격했고 그는 떨어졌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다행이었는지 두 번째 도전에서 H그룹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발령을 받은 H상선은 공교롭게도 우리 회사 건물 7층에 입주해 있었다.

   그러나 같은 건물에 있었어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둘 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서로를 찾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사한지 3개월 좀 넘어서 드디어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퇴근 때 우연히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것이다. 함께 들어간 피맛골 어느 주점에서 그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수습발령을 받은 부서는 부정기선부, 그의 담당업무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자사 선박의 진로를 체크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일이었다. 항상 텔렉스 앞에 대기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이수하던 일본어 공부를 더하기로 하고, 퇴근 후에 일본어 학원에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를 방문한 일본인 바이어와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장면을 본 영업부장이 그의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그를 영업부로 데려갔다. 영업부에서 그가 맡은 업무는 회사에 찾아오는 일본 바이어들의 접대였다. 음주가무에 조예가 있는 그로서는 제 자리를 찾은 셈이었다.

   주석(酒席)에서의 그의 활약이 커감에 따라 회사 실적도 쑥쑥 올라갔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 바이어들은 다시 오면 어김없이 그를 찾았다. 이제 간부들조차도 신입사원인 그를 술 상무로 부를 만큼 그의 영업부에서의 위치는 확고부동했다. 요정과 룸살롱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어떤 때는 눈이 맞은 호스티스와 하룻밤 정염을 불태우기도 한단다.

   “이만하면 괜찮은 직업 아니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까지도 하루하루가 즐겁다며 자신의 직업복(職業福)을 자랑했다. 그와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가 제대로 적성에 맞는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그와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어느 늦은 가을 퇴근길에서였다. 다시 만난 그 친구는 안색이 좋지 않은데다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전에 갔던 그 주점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보였고, 왠지 풀이 죽어 있었다. 전에 보였던 그 쾌활함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이젠 회사 자랑은커녕 회사 얘기는 꺼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거듭된 채근에 겨우 말문을 연 그가 호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영업부장이 지시한 대로 적은 그의 하루 일과표란다.

 

             - 오전 6: 기상 및 세면(H사 독신자아파트)

             - 오전 630: 조식(구내식당)

             - 오전 7: 회사 통근차 출발(출근)

             - 오전 8: 오전 업무처리 및 스케줄 확인

             - 12~1: 중식

             - 오후 2: 김포공항으로 가서 일본손님 영접

             - 오후 4: 일본손님 호텔로 안내 후 요정으로 가서 접대

             - 오후 8: 간부사원이 나오면 손님인계(퇴근

 

   그런데 그의 실제 하루일과는 표와는 다르단다. 낮에는 거의 일과표대로 하는데, 저녁 8시쯤 대리나 과장이 나오면 그는 바로 퇴근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한단다. 처음 몇 번은 그렇게 퇴근을 했는데, 그가 가고 나면 다시 분위기가 서먹해져서 상담(商談)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란다.

   결국, 영업부장의 지시로 그는 마지막 술자리가 파할 때인 밤 12시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일본 손님들을 호텔로 가는 택시에 태워주고 H독신자아파트로 돌아오면 거의 밤 1시가 넘는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새벽 140분에서 2시 사이, 그러니 아침 6시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자명종을 아예 630분에 맞춰놓았다.

   매일 아침을 굶고 7시에 출발하는 통근차에 올랐다. 몇 번 통근차를 놓치고 지각을 했더니 월급이 깎여서 나오더란다. 또 오후에 공항에 나가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니 저녁밥도 못 먹는다. 결국 하루 한 끼, 점심식사가 고작이었다. 그마저 입맛이 없어 공깃밥 한 그릇을 다 못 비울 때도 있단다. 그러다보니 6개월 동안 몸무게가 11kg이나 빠졌단다.

   늘 잠이 모자랐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가장 고역이었다. 출근하면 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고, 손님 접대가 없는 주말은 종일 밥도 안 먹고 숙소에서 잠만 잤다. 주 후반인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밤늦게 숙소에 돌아올 때는 지쳐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곤 했단다.

   나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내일 당장 부장에게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해. 안 그러면 사표를 내겠다고 해. 그러다 죽어. 건강부터 챙겨야지.’ 하고 말했다. 그의 확답을 듣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으나 그는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듯 묵묵부답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가 4층 내 자리로 찾아왔다. 나와 만난 그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영업부장에게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부장의 반응은 싸늘하더란다. 매일 밤늦게까지 수고하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란다. 그는 어젯밤에 쓴 사표를 영업부장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로 이리로 내려왔단다. 그가 말했다.

   “너희 회사 경력사원 뽑는다고 어저께 신문에 났더라. 입사원서 한 장 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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