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자유부인(自由夫人)’은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으로 유명한 ‘운명의 손’(1954년)을 연출한 한형모 감독이 정비석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56년에 연출한 영화이다. 상류층 가정주부의 탈선과 보수적인 가치관이 충돌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어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서울 인구가 200만 명이 채 안되던 시절 15만 명이 관람했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나온 지 70년이나 지난 영화지만 지금 봐도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2007년, ‘자유부인’은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 제347호로 지정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서울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대학교수의 부인이 춤과 연애에 빠지는 스토리인바, 단숨에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해당 신문의 구독자를 폭증시켰다. 그러자 서울대 법대 H교수가 내용이 퇴폐적이고 음란하다며 비난의 글을 올렸고, 작가가 반박문을 게재하는 등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학교수단과 여성단체까지 논쟁에 뛰어들어 한쪽에서는 연재 금지를 요구했고, 다른 쪽에서는 ‘용기를 갖고 계속 집필하라.’는 격려가 쏟아졌다.
또, 부유층의 타락상이 담긴 소설의 내용이 북한정권의 체제선전에도 이용되는 바람에 작가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소설은 195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초판 3천부가 당일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하며 총 14만부가 팔려나가 우리나라 출판사상 처음으로 10만부가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명망가인 장 교수(박암 扮)의 아내 오선영(김정림 扮)에게 양품점의 점장 취업 제의가 온다. 초등학생 아들을 가정부에게 맡겨놓고 양품점 주인을 만나러 가던 선영은 길에서 동창생 윤주(노경희 扮)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그날 명사(名士) 부인들의 모임인 화교회에 참석한다. 2차로 댄스파티가 열렸는데, 춤을 출 줄 모르는 선영은 윤주의 놀림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선영은 자신을 좋아한다며 치근거리던 옆집 청년 춘호를 찾아가 춤을 배운다. 한복을 벗어던지고 양장 차림으로 양품점에 출근하기 시작한 선영은 퇴근 후 춘호와 만나 춤을 추면서 차츰 연애감정에 빠져든다. 또, 양품점의 주인 한 사장(김동원 扮)도 선영에게 고가의 화장품을 선물하는 등 호의를 베풀면서 접근하고 있다.
한편, 장 교수는 화장품 회사의 타이피스트 은미가 찾아와 여사원들의 한글 맞춤법 교습을 부탁하자 기꺼이 승낙하면서 은미와 자주 만나게 된다. 세련된 미모의 은미가 적극적으로 자근대면서 두 사람 사이에도 핑크빛 분위기가 무르익지만, 장 교수가 워낙 목석같은 사내인지라 한글 교습이 끝나면서 두 사람의 로맨스도 시들고 만다.
이 무렵, 무역업을 하는 백 사장이 양품점에 자주 드나드는데, 그는 물건 값을 제 때 주지 않는 등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그런데 윤주는 백 사장의 허풍에 넘어가 거액을 투자하여 동업을 하고 함께 온양온천으로 여행을 가는 등 불륜행각을 벌인다. 또 여기저기 꾸어서 마련한 목돈을 백 사장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선영은 댄스 때문에 가까워진 춘호와 선을 넘고 마는데, 욕심을 채운 춘호는 선영을 멀리하고 젊은 여자에게 가버린다. 그러자 선영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던 한 사장에게 다음 화교회에 함께 가서 자신의 댄스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한 사장은 승낙하면서 자신의 애인이 되어달라고 한다. 한 사장의 부인은 남편이 선영에게 빠져있는 것을 알아채고 선영의 일탈 행적을 자세히 적어서 장 교수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 이제 결말을 보자. 백 사장은 사기죄로 붙잡혀 경찰의 취조를 받고, 윤주는 백 사장과의 불륜이 보도되어 망신을 당한 데다, 빌려준 돈도 받지 못하자 화교회 댄스파티에서 약을 먹고 자살한다. 그날 밤, 선영은 화교회에 가지 않고 한 사장과 호텔방에 들어갔다가 현장을 덮친 한사장의 부인에게 따귀를 맞는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선영은 부랴부랴 집으로 향하지만, 장 교수는 선영을 받아주지 않고 집밖으로 내친다. 그러나 ‘엄마!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어린 아들 덕분에 무사히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영화는 해피엔드로 끝이 난다.
화교회 모임에서 ‘아베크 토요일’을 열창하는 꾀꼬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수 전영록의 어머니인 인기가수 백설희이고, 한 사장 역으로 나오는 배우 김동원은 통기타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이다. 또, 당시의 유명 댄서 나복희가 댄스홀에서 섹시한 벨리댄스를 추면서 남성 관객들의 혼을 빼놓기도 한다.
‘자유부인’은 1950년대 당시 금기시되던 사치와 댄스, 불륜 등을 다루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촬영 현장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크레인을 이용하거나, 카메라를 카트에 장착하고 레일 위로 오가며 촬영하는 달리(dolly) 기법을 도입하여 혁신적인 화면을 선보였다.
영화 속에 나오는 양장 패션과 고급 화장품, 화려한 댄스홀 등은 이때가 전후(戰後) 서구문명이 급격히 유입되던 시기임을 보여준다. 또 엔진룸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 버스나 고풍스런 외제 승용차, 온통 한자 일색인 도심의 간판들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오선영이 춤과 연애에 빠지는 것은 억압된 성적 욕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우리나라에 불어 닥칠 성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시가 보수적인 가부장제 사회임을 반영한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부인’은 여성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오늘날에도 여성으로서의 주체성과 욕망이 사회적 규범과 충돌할 때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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