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가름해보아야 할 충신과 역적 ‘화흠’
최용현(수필가)
역적과 충신이라는 상반되는 평가를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 손책이 죽은 뒤 손권을 섬기다가 오의 사신으로 허도에 갔다가 조조에게로 완전히 돌아서버린 사람이다. 문사 화흠(華歆), 자는 자어(子魚). 그의 청년시절부터 짚어보자.
화흠과 동문수학한 재사(才士)에 병원과 관녕이 있었다. 이들이 학문을 익히던 시절, 함께 밭을 가는데 땅에서 금덩어리 하나가 나왔다. 이를 보고 관녕은 선비답게 못 본 체하며 계속 밭을 갈았고, 화흠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던져버렸고, 병원은 그 금덩어리를 집으로 가져갔다. 이들의 개성과 성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화이다.
또, 함께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고관대작의 가마 행렬이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러자 화흠과 병원은 행렬 구경을 하러 밖으로 나갔지만, 관녕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결국 관녕은 두 사람 모두 속물이라며 절교를 선언하고, 혼자 요동으로 가서 누각 하나를 빌어 그 위에서 기거하며 평생 동안 위나라의 땅을 밟지 않은 냉소적인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누각이 바로 관녕루(管寧樓)이다.
세간에 ‘화흠은 용의 머리, 병원은 용의 배, 관녕은 용의 꼬리이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아마도 관직으로의 출세를 지향한 화흠은 머리, 물욕이 많은 병원은 배, 반면에 벼슬과 물욕에는 관심이 없는 고매한 이상주의자 관녕은 꼬리로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화흠이 삼국지연의에서 활약하는 것은 복황후 사건 때이다.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조조의 위세에 눌려 핍박을 당하자, 복 황후는 아버지인 복완에게 헌제에게서 받은 밀조를 주며 조조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들의 음모는 조조의 치밀한 정보망에 걸려 탄로가 나고 만다.
격노한 조조, 복완의 3족을 모두 잡아 가두고 복 황후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이때 앞장선 사람이 바로 상서령 화흠이다. 그는 갑병 5백 명을 거느리고 후궁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벽 틈새에 숨어있는 복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개 끌듯 질질 끌고 전각 앞에 이르니 헌제가 달려 나와 복 황후를 끌어안으며 통곡을 했다. 화흠이 차갑게 말했다.
“위공의 명이십니다. 저리 비키십시오.”
화흠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맨발로 질질 끌려가던 복 황후가 눈물을 흘리며 황제의 손을 붙잡고 ‘이제 살아서는 폐하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하자, 황제가 ‘나도 언제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구려. 아무 힘도 없는 내 신세가 한탄스럽소.’하고 말했다.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황제와 황후의 생이별…. 통곡하는 헌제를 뒤로 하고 화흠은 복 황후를 조조에게로 끌고 갔고, 조조의 명으로 복 황후와 그녀가 낳은 어린 두 황자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
華歆當日逞兇謀(화흠당일령흉모) 화흠이 그날 멋대로 행한 일 흉악도 하구나
破壁生將母后收(파벽생장모후수) 벽을 부수어 장래의 황태후를 끌고 갔네
助虐一朝添虎翼(조학일조첨호익) 악랄함을 덧붙여서 호랑이에 날개를 더하니
罵名千載笑龍頭(매명천재소용두) 용머리라던 그 우스운 이름 오래오래 더럽히네
후세의 어느 문사가, 조조의 총애를 얻는 데 눈이 멀어 선비로서는 차마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짓을 한 화흠의 처사를 탄식하며 조롱한 시이다.
막강한 권세로 후한을 허수아비 상태로 만든 사람은 실권자 조조이고, 그런 후한을 완전히 도륙 낸 사람은 그의 아들 조비이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자, 화흠은 다시 한 번 돋보이는(?) 활약을 한다. 옥새를 내놓으라고 헌제를 겁박한 것이다.
“폐하께서는 저희들이 정한 대로 따르심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큰 화를 입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자, 헌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선양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뜻을 담은 조서를 위왕 조비에게 보낸다. 후세에 찬탈자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한 조비는 두 차례나 마음에 없는 겸양을 한 후, 화흠을 통해 다시 한 번 헌제를 다그쳤다. 화흠이 헌제에게 말했다.
“수선대(受禪臺)를 높이 쌓고 거기서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제위를 위왕에게 물려주십시오. 그러면 폐하께서는 자자손손 위의 두터운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아무 힘이 없는 황제가 어쩌겠는가. 화흠이 시키는 대로 수선대에서 황위를 조비에게 물려준 헌제는 다시 화흠에 의해 대(臺)에서 끌어내려져 조비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그리고 바로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해져 그날로 임지를 향해 떠났다.
조비가 위 황제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화흠은 사도(司徒)로 승차한다. 그러다가 조비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가 즉위하자 다시 태위가 된다. 나날이 승승장구하며 호사를 누리던 화흠, 수(壽)를 다하고 75세에 사망하여 경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런데 정사 삼국지에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얘기가 나온다. 화흠이 처음 강동을 떠날 때 그를 전송한 사람이 천명이 넘었으며, 그때 받은 전별금이 수백 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화흠은 그 전별금에 일일이 꼬리표를 달아놓았다가 모두 돌려주었을만큼 청렴했으며, 관리로서도 매사를 치우침 없이 처리하여 관리와 주민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화흠에 대한 사가의 평가도 완전히 둘로 갈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복 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간 악독한 선비요, 헌제를 협박하여 조비에게 선양을 하게 한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훌륭한 인물로, 조조와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충성을 다한 만고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과연 역적인가 충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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