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후한 황실의 두 충절 ‘동승과 길평’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5. 18:54

본문

후한 황실의 두 충절 동승과 길평

 

최용현(수필가)

 

   ‘황제를 업신여기고 국정을 제멋대로 전단하는 조조를 죽여라!’

   황제가 손수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쓴 밀조를 받은 국구(國舅) 동승(董承)은 함께 거사할 동조자로 몇 사람을 규합하였으나 조조를 죽일 마땅한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그는 마침내 몸져눕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전의 길평(吉平)을 보내 동승의 병세를 보살피게 했다.

   길평은 본초(本草)에 깊은 조예를 가진 당대의 명의로, 국구 동승과 함께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길평은 동승을 진맥하고 처방을 내린 다음, 계속 옆에서 보살피며 극진히 간호했으나 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릴 수가 없었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동승의 병세는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승이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국구 어른,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지금 형주의 유표와 하북의 원소가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향하고 있고, 또 서량의 마등과 유비도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조조는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 막기에 급급하고, 지금 승상부에는 조조 혼자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동승은 벌떡 일어나 집안의 군졸과 가솔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승상부로 쳐들어갔다. 조조 앞에 당도한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역적 조조는 이 칼을 받아라!”

   그가 바야흐로 !’하고 칼을 내려치려는 찰나, 갑자기 국구! 국구!’하며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눈을 떠보니 길평이 옆에 앉아 있었다. 꿈이었다. 꿈결에서 조조를 욕하는 잠꼬대를 한 것 같아 동승은 매우 당황하였다. 이를 눈치 챈 길평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병근(病根)을 알았습니다. 국구께서는 조조를 죽이지 못해 응어리진 마음이 병이 된 것입니다. 부디 저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한()의 신하로서 설령 3족이 멸문하는 화를 입는다 하더라도 결코 국구를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

   동승은 그때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황제가 내린 혈조를 꺼내 보였다. 길평은 피로 쓴 황제의 밀조를 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물어뜯어 동조자 연판장에 서명한 다음 분연히 말했다.

   “국구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조조의 목숨은 소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조조는 두통을 심하게 앓아 늘 제가 처방을 해왔습니다. 다음에 두통이 재발할 때 소인이 탕약에 독을 넣으면 그만입니다. 머지않아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동승은 그 말을 듣자, 병이 일시에 나은 듯 몸이 가뿐해졌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다시 기력을 회복한 동승이 혼자 후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후미진 곳에서 남녀의 간드러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젊은 남녀가 붙어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애첩이었고, 남자는 자신의 옆방에서 기거하며 시중을 드는 가노(家奴) 경동이었다. 경동은 집안의 가노 중에서 얼굴이 제일 반반한 놈이었다. 동승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내당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저 고얀 연놈들을 잡아 묶어라!”

   동승은 두 사람에게 곤장을 때리게 한 뒤 창고에 가두었다. 그날 밤, 경동은 탈출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간 곳은 승상부였다. 그는 동승의 집에 드나들면서 함께 일을 꾸민 동조자는 물론, 동승과 길평이 주고받은 밀담까지 들은 대로 조조에게 일러바쳤다.

   “, 탕약에 독을 넣는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조조, 다음날 아침 두통이 재발했다며 길평에게 탕약을 달여 오라고 지시했다. 길평은 드디어 때가 왔구나!’ 생각하며 탕약에 독을 넣어 조조에게 올렸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조조는 차갑게 웃을 뿐 마시려하지 않았다.

   “너부터 마셔보아라. 아마 못 마시겠지? 여봐라, 저 놈을 포박하라!”

   길평은 이미 일이 그릇되었음을 알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사들은 길평을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조조는 연일 혹독한 고문을 하며 주모자와 동조자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길평은 의연하고 준엄하게 조조를 꾸짖었다.

   “너는 황제를 업신여기는 간악한 역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하거늘 어찌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댈 수가 있겠느냐? 어서 나를 죽여라!”

   다음날, 조조는 성대한 연회를 열고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길평을 끌어냈다. 혹독한 고문으로 살점이 거의 다 떨어져나간 처참한 몰골이었다. 혈서를 쓸 때 깨물어 일부가 없어진 손가락을 포함하여 열 손가락이 모두 잘리어졌다.

   조조가 다시 길평의 혀까지 뽑으려 하자, 그때서야 길평은 주모자의 이름을 대겠으니 포승을 풀어달라고 했다포승이 풀리자, 길평은 황실을 향하여 두 번 절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여기서 하직하옵니다. 신은 죽어서 귀신이 되어 역적 조조를 징벌하겠사옵니다. 폐하!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주춧돌에 머리를 으깨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만조백관들 앞에서 충신이 가야할 길을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다.

   조조는 동승 및 동조자 일당을 체포하여 그 일가와 가솔 7백여 명을 무참히 참살하였다. 그러나 그도 혈조를 내린 황제를 차마 어쩌지는 못했다. 그 대신 황후, 즉 동승의 딸인 동 귀비를 목 메달아 죽였다. 황제의 아이를 수태하고 있었음에도.

   조조는 자신이 황실을 튼튼하게 지켜 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자신을 죽이려한 황제의 처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조가 보인 잔학무도한 보복은 황제를 포함, 자신의 반대세력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한쪽이 충신이면 한쪽은 역적이 된다.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동승과 길평은 쓰러져 가는 후한 황실을 끝까지 지키려한 만고의 충신이다. 그러나 자신이 황실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 조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어김없는 반역의 무리가 된다.

   그 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두 사람의 의기와 충절은 참으로 가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