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1986년 10월, 경기도 화성의 한 시멘트 농수로관 안에서 양손이 뒤로 결박된 20대 여성의 알몸시체가 발견된다. 12월에도 그 근처에서 20대 여성 이향숙의 강간당한 시체가 논바닥에 버려진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범행 후 피해 여성의 브래지어나 스타킹, 핸드백 끈 등으로 양손을 뒤로 묶고 머리에는 팬티를 씌우는데, 자신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는다. 통상 강간 살인의 경우, 범인의 체모가 피살자의 몸에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 범인은 자신의 음모를 한 올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이 연쇄강간살인사건이 크게 보도되자, 경기도 화성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다. 구 반장(변희봉 扮)의 수사팀에 이 지역 토박이 박 형사(송강호 扮)와 무지막지한 행동파 조 형사(김뢰하 扮)가 배치되고 서울시경에서 지원 나온 서 형사(김상경 扮)도 합류한다. 육감수사를 하는 박 형사와 과학수사를 하는 서 형사는 만나는 날부터 티격태격하며 싸운다.
박 형사와 조 형사는 이 지역 불량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수사하다가 이향숙 사건이 일어난 날 이향숙의 뒤를 따라다녔다는 지능이 좀 떨어지는 백광호(박노식 扮)를 잡아들여 유도심문과 구타로 진술을 받아내고 그의 신발자국 증거를 조작하여 범인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여러 기자들과 주민들이 몰려든 현장검증에서 제대로 입증을 하지 못해 영장이 기각되면서 망신만 당하고 구 반장은 파면된다.
과학수사를 중시하는 신 반장(송재호 扮)이 부임한다. 사건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던 서 형사는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범행대상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수사팀은 비가 오는 날 밤에 여경(女警)에게 빨간 옷을 입혀서 야산 길을 걷게 하여 함정수사를 벌이지만, 다음날 아침 그 근처에서 젊은 여성이 강간당한 채 음부 속에 복숭아 조각이 들어있는 엽기적인 시체로 발견된다.
박 형사는 이번에도 범인의 체모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고 대중목욕탕에 들어가 무모증 남자를 찾기도 하고, 용하다는 점쟁이도 찾아가보지만 별무소득이다. 문득 이향숙이 피살되는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하던 백광호가 범행현장을 봤을 것 같은 감(感)이 들어 찾아가는데, 겁에 질린 백광호가 도망치다가 열차에 치여 죽고 만다.
서 형사는 한 여중생으로부터 학교 화장실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학교를 찾아갔다가 화장실 옆 외딴집에서 혼자 사는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비오는 날 밤에 범인에게 강간을 당했으나 얼굴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이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며, 범인은 손이 아주 부드러웠다고 말한다.
한편, 범행이 있던 날 저녁마다 FM라디오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방송된 것을 수사팀의 여경이 알아내자, 서 형사는 엽서를 보낸 사람을 추적하여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扮)를 찾아낸다. 손도 부드러웠다. 그의 정액을 미국에 보내 유전자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서 형사에게 소문을 얘기해준 여중생이 또 강간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런데 미국에서 날아온 검사결과 박현규는 범인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녹즙기 영업사원으로 이직한 박 형사가 화성을 지나면서 차를 세우고 전에 피살된 여성의 시체가 들어있던 시멘트 농수로 관을 들여다보면서 영화가 끝난다.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에서 10차에 걸쳐 10명의 여성이 강간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 와요’를 원작으로 하여 2003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봉준호 감독에게 디테일이 살아있는 감독이라는 뜻의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고, 32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52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그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아울러 이 영화는 대한민국영화대상 6관왕, 청룡영화상 2관왕, 대종상 4관왕을 비롯하여 주요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또 해외에서 개최하는 국제영화제에서도 많은 상을 받았다.
‘살인의 추억’은 같은 해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2003년)와 함께 당시를 풍미하던 조폭코미디물이나 한국형 블록버스터물을 과감히 탈피하여 적은 제작비로 작품성과 완성도를 높여 큰 수익을 올린 웰 메이드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를 기점으로 봉준호와 박찬욱은 우리 영화계를 이끌어갈 거목 감독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 영화는 1980년대 말에 민주화 열풍을 막는 데모 진압에 동원되는 경찰의 현실과 마구잡이식 수사를 하면서 유전자검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경찰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기경찰청 강력계장인 하승균 형사 역을 맡은 박 형사가 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되었는데, 송강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 대사는 진범에게 하는 말이었다고 했다.
1988년 8차 사건인 14세 여중생 강간살해사건에서 근처에 사는 농기계수리공 윤성여(22세) 씨가 체모 성분이 범인의 것과 같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무기징역 형을 받았고, 수사팀 5명은 모두 1계급씩 특진하였다. 윤성여 씨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3일간 잠을 못자고 가혹행위를 당해서 거짓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의 고문으로 용의자 3명이 자살했고 1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윤성여 씨는 2009년 만기 출소했다.
2019년 9월, 경기남부경찰청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처제를 강간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인 이춘재(56세)라고 발표했다. 그는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 모두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으며, 마지막 10차 사건의 공소시효는 2006년 4월에 끝났다. 그는 교도소에서 ‘살인의 추억’ 영화를 봤는데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고 말했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는 재심을 청구하여 2020년 12월 17일 무죄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