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1995년 일본 개봉 때는 관객이 고작 2만 명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불법복제 비디오가 30여만 개나 팔렸고, 4년 후 극장개봉 때는 관객 140만 명이라는 대박을 터뜨린 영화가 있다. 광활한 설원(雪原)에서 한 아가씨가 뒷모습을 보이며 ‘잘 지내고 있나요?’라는 의미의 ‘오겡키데스카?’ 하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오는 일본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이다.
이 영화는 원작소설을 쓴 이와이 슌지가 각본과 감독까지 맡은 로맨스물로, 일본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요코하마영화제에서도 작품상을 포함하여 6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또 일본의 저명한 영화잡지 키네마 슌포(旬報)의 독자투표에서 그해 최고의 영화로 뽑히기도 했다. 여심을 저격하는 애틋한 스토리로 아시아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작 일본에서 흥행 참패를 기록한 것은 참으로 미스터리이다.
일본의 인기배우이자 아이돌 가수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을 맡아 캐릭터가 다른 두 여인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에 개봉을 한 후 2013년, 2016년, 2017년, 2019년 겨울에 재개봉을 했으니 20년이 지난 후에도 사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고베에 사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扮)는 등산사고로 죽은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 扮/이하 후지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후지이의 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집에까지 따라간 히로코는 그의 중학교 졸업앨범에서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살던 때의 주소를 적어 와서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쓴 편지를 보낸다.
며칠 후, ‘저도 잘 있어요. 감기에 걸렸지만.’이라고 쓴 답장이 왔다. 놀란 히로코가 누군지 물으니 주민증을 복사해서 보내왔는데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다. 히로코는 의아한 생각에 연인이면서 죽은 후지이의 친구 아키바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오타루의 그 주소로 찾아간다. 히로코는 외출중인 후지이 이츠키를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고 ‘지금 님의 집 앞에서 쓰고 있어요. 제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남자입니다.’라는 메모를 남겨놓고 돌아온다.
오타루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扮/이하 이츠키)는 메모를 보고 ‘중학교 때 같은 반에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있었다,’고 편지로 알려준다. 히로코가 보낸 편지는 졸업앨범에 주소가 수록된 이츠키에게 갔고, 답장도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졸업 직전에 전학 간 후지이는 졸업앨범에 사진만 실렸고 주소는 수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후지이의 중학교 졸업앨범을 다시 찾아본 히로코는 이츠키(사카이 미키 扮)가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히로코는 내성적인 성격의 후지이가 자신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며 사귀자고 한 것은 자신이 이츠키와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면서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궁금증도 생겼다.
히로코는 후지이의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편지를 보낸다. 이츠키는 이름이 같은 남녀가 한 반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둘이 사귄다.’를 필두로 둘이 함께 도서부장으로 뽑힌 얘기, 바뀐 시험답안지 뒷면에 후지이가 수영복을 입은 여자를 그린 얘기, 다리를 다친 후지이가 100m 경주에서 뛰다가 넘어진 얘기, 후지이가 수많은 책의 도서카드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을 써놓은 얘기 등등을 편지로 들려준다.
한편, 이츠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보내면서 중학교 운동장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는 히로코의 부탁을 듣고 중학교를 찾아갔다가 도서반 후배들도 만나고 그때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후지이가 2년 전에 등산사고로 죽었다는 얘기도 듣는다. 그날 밤, 감기를 앓던 이츠키는 심한 고열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 폭설 때문에 구급차가 오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이츠키를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 가까스로 회생한다.
히로코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인 아키바와 함께 후지이가 조난당한 홋카이도의 그 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산 아래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일어난 히로코는 밖으로 나와 후지이가 죽은 산을 바라보며 ‘오겡키데스카? 아타시와 겡키데스!(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하면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한편, 이츠키는 후지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이츠키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후지이가 집으로 찾아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7권을 대신 반납해 달라며 주고 간다. 일주일 후에 등교한 이츠키는 후지이가 전학 간 것을 알고, 배신감에 그의 책상 위에 있던 꽃병을 내동댕이치고 교실을 나가버린다. 이츠키는 그 이야기를 쓴 편지를 히로코에게 보낸다.
히로코는 그동안 이츠키가 보내준 후지이에 관한 여러 편지와 물품들을 모두 돌려보내주면서 ‘이 추억들은 모두 당신 것이에요.’ 하고 마지막 편지를 쓴다. 그러면서 ‘후지이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고 말한다. 그러나 이츠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전에 만났던 도서반 후배들이 전에 후지이가 반납을 부탁했던 그 책을 들고 이츠키의 집으로 찾아온다. 후배들이 가리키는 도서카드의 뒷면을 보니 중학교 교복을 입은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츠키는 후배들 때문에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후지이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츠키는 ‘가슴이 아파서(쑥스러워서의 오역)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독백처럼 말한다.
히로코가 홋카이도의 설원에서 ‘오겡키데스카?’ 하고 외치는 모습은 이 영화를 대표하는 명장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지이가 그려준 중학교 때의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츠키가 그리움을 머금고 살포시 미소 짓는 모습이 최고의 명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