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1964년 2월 29일, ‘맨발의 청춘’을 개봉하는 광화문 조선일보사 옆 아카데미극장 앞에 아침부터 줄서기가 시작되더니 어느새 그 줄이 덕수궁까지 이어졌다. 이 영화는 연일 전회 매진을 기록하면서 당시 서울인구 350만 명 중에서 21만 명이 관람하는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주연을 맡은 신성일과 엄앵란 콤비는 그해 11월 결혼에 골인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60년대 최고의 남자가수 최희준이 부른 이 영화의 주제곡 ‘맨발의 청춘’의 1절 가사이다.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유호가 작사를 했고, 가수 현미의 남편이던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가 작곡을 하여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맨발의 청춘’은 영화와 노래 모두 불후의 명작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청년 두수(신성일 扮)는 밀수조직의 전달책이다. 어느 날, 두수는 밀수시계를 전달하러 가다가 불량배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여대생 요안나(엄앵란 扮)와 그녀의 친구를 구해준다. 며칠 후, 요안나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두수가 사는 곳에 찾아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요안나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현직 외교관의 딸이고, 두수는 자신을 따르는 건달 동생 아가리(트위스트 김 扮)와 함께 길거리에서 공갈협박을 하면서 번 돈으로 창녀촌 아파트에 방을 얻어 살아가는 밑바닥 인간이다. 두수와 요안나는 뚜렷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이트를 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관심사를 같이 해보려고 노력한다. 두수는 요안나를 레슬링 경기장으로 데려가고, 요안나는 두수를 클래식 음악회에 데리고 간다. 두수는 요안나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운명’을 들어보고 성경책을 읽으며 주스도 마셔본다. 요안나는 권투 잡지를 읽고 위스키를 마셔보고 아령을 사서 운동도 해본다.
어느 날, 요안나를 만나러 가던 두수가 길에서 경찰에 잡혀가자, 요안나는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두수를 걱정하며 두수가 사는 곳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한다. 얼마 후 두수가 출소하자, 요안나는 두수가 건달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하려고 어머니의 지인을 찾아가 식사자리를 함께 하며 취직을 부탁한다. 거기서 서투른 식사매너와 무학무식(無學無識)으로 곤욕을 치른 두수는 다시 예전의 건달생활로 돌아가려 한다.
요안나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요안나를 그녀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태국으로 보내려고 비행기표를 구입한다. 요안나를 잊기로 한 두수는 조직을 위해 시계밀수사건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기로 한다. 이때 집을 뛰쳐나온 요안나가 두수가 사는 방으로 찾아오자, 두 사람은 경찰과 조직의 눈을 피해 도망친다.
시골의 한 물레방앗간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함께 접은 종이학 두 마리를 나란히 매달아놓고 ‘나의 살던 고향은~’을 함께 부르며 요안나가 준비해온 약을 먹고 동반 자살한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날, 요안나의 시신은 꽃 장식을 한 장의차에 실려 가족묘지로 향하고, 두수의 시신은 리어카에 실려 거적때기에 덮인 채 공동묘지로 향한다.
‘맨발의 청춘’은 누벨바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흑백영화로, ‘남과 북’(1965년) ‘대괴수 용가리’(1967년) 등을 감독한 김기덕 감독(‘나쁜 남자’의 김기덕 감독은 동명이인)의 대표작이다. 신성일의 반항적인 눈빛과 엄앵란의 청순한 매력, 트위스트 김의 현란한 춤 솜씨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청춘영화의 고전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본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년)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당시 제작사측에서는 일본 원작자의 허락을 받고 만든 리메이크 작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원작이 같으니 스토리는 같을 수밖에 없지만, 두수의 다친 손가락을 요안나가 붕대로 감아주는 장면, 둘이서 종이학을 접으며 얘기하는 장면 등은 일본영화와 아주 똑같다고 한다. 어쨌거나 뒷맛은 좀 씁쓸하다.
이 영화는 60년대의 서울 도심인 광화문과 서울시청, 남산 등의 거리풍경과 당시의 유흥 풍속장인 음악다방과 댄스홀 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아울러 그 시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주고 있다. 당대 최고의 춤꾼이었던 트위스트 김과 탤런트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 영화배우 엄태웅의 장인 윤일봉, 그리고 아폴로 박사로 불리던 조경철 천문학자의 부인 전계현 등….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청춘들은 부잣집 딸과 뒷골목 건달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두 연인이 철옹성 같은 신분의 벽을 뚫지 못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음을 택하자, 극장 안은 관객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비련(悲戀)에 관객들도 함께 울었던 것이다.
두 연인의 마지막 가는 길은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며 이 영화를 상징하는 장면이 되었다. 요안나를 실은 장의차는 뒤에 조문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두수를 실은 리어카는 조문객 한 사람 없이 아가리 혼자서 끌어가고 있다. 거적때기 아래로 맨발이 삐죽 나온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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