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예순 가까운 나이에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는 무장 황충(黃忠), 자는 한승(漢升). 형주에서 중랑장을 지내다가 장사태수 한현을 섬기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명궁(名弓)에다 용력도 대단했다. 그의 활 솜씨는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을 정확히 꿰뚫을 정도였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유비는 형주 점령에 이어 계양군과 무릉군을 쳐서 빼앗고, 다시 관우를 앞세워 장사군을 공략하고 있었다. 정벌군의 선봉 관우와 장사군의 용장 황충의 싸움은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이었고, 백 합이 넘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음날, 두 장수가 다시 불꽃을 튀기며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황충의 말이 발을 헛디딘 듯 갑자기 황충이 말에서 떨어졌다. 관우가 다가가 청룡도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말의 실수에 편승한 승리는 의(義)가 아니라고 생각한 관우, 칼을 도로 거두며 말했다.
“얼른 돌아가서 다시 말을 바꿔 타고 오너라!”
황충은 성안으로 물러갔으나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그때 관우가 칼을 내려쳤으면 자신의 목은 영락없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으리라.
황충은 진채로 돌아와 새 말로 갈아탔다. 다시 나가 관우와 맞붙게 된 황충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거짓으로 도망치다가 돌아서서 활을 쏠 심산이었다. 관우가 쫓아왔다. 황충이 갑자기 획 돌아서며 활을 쏘았다. 날아간 화살은 관우의 투구 끈을 뚫고 투구 언저리에 정확히 꽂혔다.
깜짝 놀란 관우,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황충이 자신의 투구끈을 쏜 것은 아까 자신을 죽이지 않은데 대한 갚음 같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의 머리를 한 살에 꿰어놓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했다.
그날 싸움이 그렇게 끝나자, 태수 한현은 즉시 황충의 목을 베라고 명을 내렸다. 명궁인 황충이 일부러 관우를 맞히지 않고 살려주었다며. 이때 젊은 장수 위연이 반기를 들어 한현의 목을 베고 황충을 구출하여 함께 유비진영에 항복한다. 황충은 태수 한현을 장사지낸 후, 유비를 섬기는 촉의 장수가 되었다. 그리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노익장을 과시, 위연과 함께 유비가 서촉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유비와 조조의 한중쟁탈전에서 황충은 수십 년간 조조의 측근으로 활약하던 맹장 하후연을 활을 쏘아 죽이는 개가를 올렸다. 결국 유비는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아 한중왕으로 등극하고, 노장군 황충은 관우 장비 조운 마초와 함께 촉의 오호(五虎) 대장군에 위촉되었다.
그 후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오의 여몽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장비마저 부하에게 살해되어 그 수급이 오나라로 넘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나자, 유비는 두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대대적인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이때 유비는 황충과 더불어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를 선봉장으로 명했다. 젊은 두 장수는 각각 죽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전, 서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장수를 격려했다.
“이제 지난날의 장수들은 모두 늙어서 아무 쓸모없게 되었다. 그런데 젊은 두 조카가 이토록 용맹스러우니 오나라 따위를 겁낼게 무어랴!”
젊은 두 장수를 칭찬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앞에 한 말 ‘늙은 장수들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가 문제였다.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노장군 황충은 같은 연배의 장수인 오반의 막사로 달려가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때까지 숱한 싸움터를 누볐으나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내 나이 비록 일흔이 넘었으나 아직도 고기 열 근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고, 쌀 두 섬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만이 당길 수 있는 활을 쏠 수 있다. 그런 나를 늙었다고 어찌 이리 무시하는지.”
황충이 격한 음성으로 불평을 토로하고 있을 때 마침 군사 하나가 와서 오군의 선봉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황충,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말에 오르며 쏜살같이 군막을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오군을 향해 돌진하며 홀로 싸움을 걸었다. 적장은 오군의 맹장 반장이었다. 그날 황충의 기세가 워낙 드센 탓인지 반장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반장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앞장서서 쳐들어오자, 황충은 주위사람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다시 혼자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반장은 몇 합 싸우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충이 소리치며 뒤를 쫓았다.
“이놈, 달아나지 마라! 오늘은 너의 목을 가져가야겠다!”
그러나 그것은 반장의 계략이었다. 황충이 적진 깊숙이 쫓아갔을 때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오군이 쏜 화살 하나가 그의 어깨에 꽂혔다. 황충이 비틀거리며 퇴로를 찾고 있는데 때마침 관흥과 장포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다.
진채로 돌아온 황충, 상처를 치료했으나 워낙 늙어서 그런지 상처가 점점 더 깊어졌다. 유비는 몸소 황충의 병상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이번에 노장군께서 부상을 당한 것은 순전히 나의 실언 때문이오. 부디 용서해주구려.”
그러자 황충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신(臣)은 한낱 무부(武夫)로서 촌구석에서 썩을 몸이었습니다만, 늦게나마 폐하를 만나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지냈습니다. 신의 나이 일흔 다섯,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고 힘을 길러 꼭 중원을 평정하십시오.”
그날 밤 황충은 숨을 거두었다. 유비는 그의 시신을 성도로 보내 후히 장사지내게 했다.
노장군 황충. 늙어서야 삼국지에 등장했으나 빛나는 무용과 올곧은 충의로 노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지막에는 이성을 잃고 혼자 무모하게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그 또한 노병의 아름다운 용기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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