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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이와 핸드백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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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이와 핸드백

 

최용현(수필가)

 

   초등학교 3학년인 작은 딸 혜진이에게는 애지중지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작년 가을에 부산에 사는 막내 이모가 사준 조그만 손가방이다. 귀엽고 앙증스럽게 생긴데다 기다란 끈이 달려 있어 어깨에 걸치도록 되어있다. 분홍색으로 고르더란다. 제 언니 것은 보라색으로 골라주고.

   5학년인 언니 영진이는 좀 커서 그런지 옷장에 걸어놓았다가 어디 갈 때나 가끔 들고 가는 정도인데, 혜진이는 유별나다. 학교에 갈 때 책가방과 보조가방에다 무슨 준비물까지, 들고 가는 것이 두세 가지나 되는 날도 핸드백은 빼놓지 않고 걸치고 간다.

   학교에 갔다 와서 피아노학원에 갈 때도, 놀이터에 나갈 때도, 어떤 때는 집에서 화장실에 갈 때도 들고 간다. 잠잘 때 빼놓고는 거의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 안에 무슨 보물이 들어있는지.

   지난 설날연휴 때 고향 형님 댁에 갔다가, 차례를 지낸 후 어릴 때 살던 고향 마을 집안 어른들과 읍내의 여러 친척들에게 세배하러 다니다가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마지막으로 제 외가에 갔을 때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핸드백이 없어졌다는 거였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노는 데 얼마나 정신이 팔렸던지 그 애지중지하던 핸드백을 어느 집에 두고 온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잘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고향 마을 작은할머니 댁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했다. 내일 서울에 올라간다고 인사까지 하고 나온 터에 다시 그 집에 가기가 좀 뭣해서 더 예쁜 것 사 주겠다고 해보았다. 필요 없단다.

   그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느냐고 물었더니 주섬주섬 읊어대는 것이 대충 이러했다. 여기저기서 받은 세뱃돈을 넣어놓은 노란색 지갑, 친구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 꽃무늬 메모지, 조그만 손거울, 자전거 열쇠, 그리고 미니 볼펜 세트. 결국, 어둑어둑해질 무렵 차를 몰고 다시 작은할머니 댁에 가서 핸드백을 찾아오고서야 그 소동은 해결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귀경길에 올랐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가까이 오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차들이 모두 거북이 걸음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졸리는지 눈을 감고 있었고, 뒷좌석에는 혜진이가 핸드백을 걸친 채 언니와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앞 유리에 부딪치는 눈들은 쉼 없이 연동하는 와이퍼에 밀려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오래 전, 군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받던 여자가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함께 자란 후배였다. 휴가 나왔다가 대학생이 된 그녀를 동네에서 만났고, 귀대한 후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편지를 썼다가 답장이 오면서 군 생활 내내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키워갔다.

   다음해 봄에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부산에 있는 무슨 타자학원으로 그녀를 찾아갔고,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해운대 백사장에는 제법 많은 연인들이 나와 손을 잡고 거닐고 있었다. 우리도 손잡고 백사장을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었지, 아마.

   내가 제대를 하고 고향에 왔을 때 그녀도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집에 와있었다. 우리는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해 올빼미처럼 밤에 만났다. 뒷산 기슭에 앉아서 함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달빛을 벗 삼아 과수원 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어떤 때는 뒷산 너머 십리가 넘는 저수지 옆길을 손잡고 한 바퀴 돌아오기도 했다.

   서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던 우리는 드디어 올빼미데이트를 청산하고 문명세계에서 만나기로 했다. 며칠 뒤 그녀로부터 쪽지가 왔다.

 

                          내일 만나. 오후 2,

                          부산역 앞 행운다방

                          달빛도 풀벌레 소리도 잊혀진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해변을 걸으며

                          거기 무언가를 심어두고 싶다.

                          조용한 카페에서 찻잔을 기울이며

                          잊혀지지 않을 얘기 나누고 싶다.

 

   그날,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폭설 속에 패퇴하던 장면, 주인공 오드리 헵번과 헨리 폰다가 마지막에 결혼식을 올리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다. 나타샤 왈츠의 경쾌한 선율과 함께.

   다시 버스를 타고 다대포로 향했다. 우리가 백사장을 오가는 동안 휘영청 밝은 달빛이 다대포 앞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다시 시내로 들어온 우리는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2층 여관방에 나있는 조그만 창문으로 달빛이 교교히 흘러들고 있었다. 우리는 창문 앞에 나란히 꿇어앉아 달님에게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했다.

   그녀의 하얀 핸드백이 눈에 띄었다. 그 속이 궁금했다.

   “이 핸드백 열어봐도 돼?”

   “, 보고 싶으면 봐.”

   그때 열어본 핸드백, 거기에 뭐가 들어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자가 자신의 핸드백 속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속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 훨씬 이후에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자리에 누웠고 그녀는 내 팔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처음 핸드백을 열어보고 싶었고, 내게 아무 거리낌 없이 핸드백을 열어준 그 여자와는 결국 헤어졌다.

   “혜진아, 서울이다. 집에 다 왔어. 빨리 일어나.”

   차가 광명대교에 들어설 무렵, 언제 일어났는지 큰딸 영진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은 그쳐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연속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열심히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혜진이에게 핸드백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안 돼!”

   나는 핸드백을 보자고 한 여자에게 처음으로 거절을 당했다. 그 상처(?)로 인해 한동안 혜진이한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말을 걸어와도 외면했다. 며칠 후 그 아이가 핸드백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등에 붙어서 치근거렸다.

   “아빠, 내 핸드백 보여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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