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색, 계(色, 戒)’는 중국 상하이 출신의 여류작가 장아이링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이 2007년 미국과 홍콩 합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러닝 타임이 2시간 37분이나 되지만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 긴박감이 넘쳐서 전혀 지루하지 않다. 여기서 ‘색(lust)’은 욕망, 즉 감성을 의미하고, ‘계(caution)’는 분별, 즉 이성을 의미한다.
개봉 당시, 적나라하고 파격적인 베드신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중국 등 상당수 국가에서는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개봉하였다. 미국에서는 삭제하지 않고 NC-17 등급으로 개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삭제 없이 청소년관람불가로 개봉했는데, 누적 관객이 192만 명을 넘었다.
이 영화는 중일전쟁 때 간첩활동을 하게 된 여대생과 그녀의 표적(標的)이면서 연인이었던 친일파 거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야기이다. 줄거리를 살펴보자.
1938년, 전쟁을 피해 어릴 때부터 살던 상해를 떠나 홍콩대학에 편입한 왕치아즈(탕웨이 扮)는 광위민(왕리홍 扮)이 주도하는 연극부에 가입한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연극공연으로 큰 박수를 받은 단원들은 친일파 이 대장(양조위 扮)을 암살하기로 결의한다. ‘막 부인’으로 위장한 왕치아즈는 이 대장의 아내(조안첸 扮)에게 접근하여 함께 마작을 하면서 친분을 쌓는다.
어느 비오는 날, 왕치아즈는 이 대장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고, 두 사람은 다시 레스토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이 대장이 자신의 차로 숙소까지 바래다주자, 왕치아즈는 다음에는 그가 틀림없이 자신의 몸을 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부인 행세가 탄로날까봐 성경험이 있는 연극 단원에게 순결을 준다. 그러나 이 대장이 상하이로 발령 나면서 재회가 무산된다.
1941년, 상하이 이모 집으로 와서 복학한 왕치아즈는 저항군의 일원으로 이곳에 온 광위민과 연극단원들을 다시 만난다. 이때 이 대장은 친일 괴뢰정부의 정보부 장관으로 승진하여 저항군을 색출하고 있었다. 왕치아즈는 다시 ‘막 부인’이 되어 상류층 부인들의 마작모임에 나가면서 이 장관을 암살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
왕치아즈와 이 장관은 3년 만에 재회를 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호텔에서 밀회를 한다. 이 장관이 혁대를 풀어 사디스트(sadist)처럼 왕치아즈를 후려치더니 두 손을 뒤로 묶고 속옷을 거칠게 벗기고 뒤에서…. 다음 만남에서는 그의 리드에 따라 고난도의 체위를 시도하면서 함께 황홀경에 이르고, 두 사람은 만남을 지속하면서 정염(情炎)을 불태운다.
1942년, 이 장관이 왕치아즈에게 명품 다이아반지를 주문해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왕치아즈는 동료 단원들에게 연락하여 금은방 주위에 매복하도록 한다. 이 장관을 금은방으로 유도한 왕치아즈가 반지를 껴보고 빼려하자 이 장관이 ‘그냥 끼고 있어.’ 하고 말한다. 그녀가 ‘누가 노리면 어쩌죠?’ 하고 되묻자, 그는 ‘내가 지켜줄게.’ 하고 답한다. 감동한 왕치아즈가 심적 동요를 일으키며 ‘가요! 어서!’ 하고 말한다. 위험을 직감한 이 장관이 쏜살같이 뛰어나가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사라진다.
이 장관을 암살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 동료 단원들과 왕치아즈는 결국 체포된다. 이 장관은 자신도 일본 정보망의 감시대상임을 알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체포한 저항군 단원들을 모두 총살하는 서류에 서명한다. 왕치아즈가 동료 단원들과 함께 채석장에서 처형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색, 계’는 중견배우 양조위와 탕웨이가 치명적(致命的)인 사랑을 보여주면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그해 대만의 금마장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최우수영화상, 남우주연상, 신인상, 각색상 등 7개 부문을 휩쓸었고, 베니스영화제에서도 황금사자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 홍콩 금상장에서는 아시아영화상을, 아시아필름 어워드에서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안 감독은 ‘와호장룡’(2000년)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브로크백 마운틴’(2005년)과 ‘라이프 오브 파이’(2012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받은 세계적인 거장이다. 그의 완벽주의는 ‘색, 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1940년경의 상하이 거리와 전차, 풍물 등을 완벽하게 화면에 재현해냈고, 20분 남짓 나오는 섹스 신을 11일 동안이나 촬영하기도 했다.
이 영화 최고의 히로인 탕웨이는 중국 중앙희극학원을 졸업하고 미스 월드 베이징대회에 출전하여 5위에 입상한 신인배우로, ‘색, 계’의 여주인공을 뽑는 오디션에서 1만 명이 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발탁되었다. 섬세한 내면 연기와 함께 파격적이고 고난도의 베드신까지 소화하여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하였다. 그리고 ‘만추’(2009년)로 인연을 맺게 된 우리나라의 김태용 감독과 2014년 결혼하였다.
한 가지, 왕치아즈가 홍콩대학 연극부에 가입할 때부터 좋아하던 광위민이 그동안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다가 상해에서 느닷없이 키스를 하자, 왕치아즈가 ‘왜 3년 전에 하지 않았어?’ 하고 힐문하면서 광유민을 밀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사랑은 타이밍인데….
‘색, 계’의 모티브가 된 왕치아즈의 실존 인물 정핑루(1918~1940)의 사진을 보면 바바리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모습이 영화 속의 탕웨이와 거의 흡사하다. 빼어난 미모를 갖춘 정핑루는 중·일 전쟁 때 상하이의 일본 정보기관 간부의 비서로 있으면서 스파이 활동을 한 국민당의 비밀요원이었다.
1939년 12월, 정핑루는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뒤에 세운 친일 괴뢰정부의 특무부장이었던 딩모춘(1901~1947)을 암살하려했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고, 22살 꽃 다운 나이에 총살당했다. 종전 후, 46세의 딩모춘도 일본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국민당 정부에 의해 난징교도소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