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알프레드 히치콕(1899~1980)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한 인물로, 서스펜스 장르의 개척자, 스릴러의 거장, 화면의 마술사 등으로 불리며, ‘레베카’(1940) ‘오명’(1946) ‘이창’(1954)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싸이코’(1960) ‘새’(1963) 등 60여 편의 주옥같은 걸작들을 남긴 전설적인 영화감독이다.
‘현기증(Vertigo)’은 짜임새 있는 구성과 세련된 영상미, 뛰어난 완성도로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뽑은 세계 100대 영화에 9위로 선정되었다. 이 영화는 기억과 망상을 넘나드는 미스터리를 다룬 전반부와 숨 막히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다룬 후반부가 빈틈없는 얼개로 연결되어있어서 미스터리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찰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 扮)는 범인추격을 하다가 지붕에 매달리게 된 자신을 구하려던 동료가 추락사한 이후부터 고소공포증을 앓게 된다. 높은 곳에만 올라가면 어지럼증과 주위가 빙빙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다.
경찰을 사직하고 탐정 일을 시작한 그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친구로부터 26살 아내를 미행하면서 보호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의 아내 매들린(킴 노박 扮)은 눈부신 금발미인으로, 매일 차를 몰고 돌아다니는데, 26살 때 자살한 할머니의 혼령이 씌었는지 가끔씩 망상에 사로잡혀 이상한 행동을 한단다.
매들린의 차를 따라가 보니 꽃다발을 사서 공원묘지에서 참배를 하고 미술관에 가서 증조모 칼로타의 초상화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나와서 낡은 호텔에 들렀다가 사라진다. 다음날은 미술관에 들렀다가 금문교 아래로 가더니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놀란 스카티가 물에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면서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매들린의 꿈속에 자주 등장한다는 교외의 오래된 스페인수녀원을 찾아간다. 뜨거운 키스를 나누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매들린이 따라오지 말라며 종탑으로 올라가자, 불길한 예감에 스카티도 따라 올라간다. 스카티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종탑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서 멈추는데, 그때 매들린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스카티는 매들린의 자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대학친구는 사고였으니 자책하지 말라며 이곳을 떠난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온 스카티는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 죽은 매들린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발견하고 따라간다. 스카티는 쥬디라는 이름의 그 여인과 만남을 이어가면서 계속 옷을 사주며 매들린과 똑같이 치장하도록 집요하게 종용한다.
그러다가 스카티는 매들린의 증조모 칼로타의 초상화에서 본 목걸이를 쥬디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쥬디가 매들린임을 알아챈다. 스카티는 매들린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쥬디를 앞세워 그 종탑 꼭대기에 올라간다. 그때 뒤따라오던 수녀들의 소리에 놀란 쥬디가 발을 헛디디며 종탑 아래로 떨어지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를 세 가지의 관전 포인트로 살펴보자.
첫째, 현기증을 상징하는 나선형의 소용돌이 이미지이다.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여자의 얼굴이 나오고 화면은 다시 입술에서 눈으로 향하는데, 한쪽 눈동자에서 나선형 회오리가 나오면서 영화제목이 불쑥 다가온다. 이어 기하학적 도형이 계속 나오면서 빙글빙글 도는데, 이 장면들은 영화사상 처음으로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든 것이란다.
이 나선형 이미지는 칼로타의 초상화 머리와 똑같이 동그랗게 말아 올린 매들린의 머리에서,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따라 빙빙 도는 두 승용차에서, 스페인수도원의 종탑으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계단 등에서 계속 나온다. 이것은 스카티가 앓고 있는 고소공포증에서 비롯된 현기증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둘째, 히치콕 감독이 창시한 맥거핀과 줌인 트랙아웃 기법이다. 맥거핀(macguffin)은 속임수나 미끼를 뜻하는데 쉽게 말해서 헛다리짚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긴장도를 높이고 몰입하도록 하는 기법이다. 매들린이 칼로타의 악령에 씌었는지, 매들린이 좀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등은 맥거핀이다.
줌인 트랙아웃(zoom in track out)은 줌을 당기면서 카메라를 뒤로 빼거나 카메라를 줌인해서 피사체에 집중하고 트랙으로 줌아웃하면서 카메라를 피사체 쪽으로 다가가게 하는 기법으로, 피사체의 크기를 유지하면서 배경이 더 깊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낸다. 스카티가 지붕에 매달렸을 때와 종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때 느낀 고소공포증과 현기증을 더욱 심도 있게 표현한다.
셋째, 쥬디의 정체와 비극적인 결말이다. 쥬디는 호텔까지 따라온 스카티와 저녁약속을 한 후, 메모지에 자신이 매들린이며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고 써놓고 멀리 떠나려 했지만 마음을 바꾼다. 나중에 스카티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쥬디의 목걸이를 보고 쥬디가 매들린임을 알게 되고, 단숨에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다.
정리해보면, 고소공포증 때문에 스카티가 종탑 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대학친구가 매들린과 똑같은 옷을 입은 진짜 아내와 함께 종탑 위에서 기다렸다가 매들린이 올라왔을 때 아내를 아래로 밀어뜨린 것이다. 매들린은 돈을 받고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스카티는 대학친구의 자기아내 죽이기 프로젝트의 숨은 조력자가 된 것이다.
스카티는 쥬디와 함께 다시 그 수녀원의 종탑에 올라감으로써 자신의 고소공포증도 극복하고 죄책감에서도 벗어나게 되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