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오동맹을 이뤄낸 주역 ‘등지와 진복’
촉오동맹을 이뤄낸 주역 ‘등지와 진복’
최용현(수필가)
삼국지의 3대전은 관도대전과 적벽대전 그리고 이릉대전이다. 관도대전은 조조가 원소의 대군을 격파하고 강북을 제패한 전쟁이고, 적벽대전은 유비와 손권이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전쟁이다. 이릉대전은 촉과 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약소국인 촉과 오가 강대국인 위의 공세에서 살아남으려면 촉오 간에는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한 나라가 공격을 받으면 연합해서 대항해야 한다. 적벽대전 이후 촉오 사이에 그런 묵시적인 동의가 있어왔다. 그런데, 촉주 유비는 관우를 죽인 오를 정벌하겠다며 제갈량과 조운 등 대신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이끌고 오에 쳐들어간다.
이 이릉대전에서 유비는 오의 대도독 육손의 화공(火攻)에 참패하여 백제성까지 물러나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위의 조비는 촉을 정벌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촉으로 진격하게 한다.
제갈량은 네 갈래로 오는 위군은 물리칠 대책을 세우고 각 장수들에게 명하여 조치를 취했으나 나머지 한 갈래인 위의 사주를 받고 오는 오군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난감했다. 오군의 침공을 막으려면 이릉대전으로 빚어진 촉오 간의 적대감정을 씻고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갈량은 이 막중한 임무를 상서 등지에게 맡긴다.
등지(鄧芝), 자는 백묘(伯苗)이고 후한의 공신 사마(司馬) 등우의 후손이다. 강직하고 담대하며 식견과 언변이 뛰어난 인물이다. 익주를 평정한 유비가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바로 현령으로 발탁했다. 후에 광한태수로 승진하였고,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호부상서가 된 것이다.
촉에서 등지가 사신으로 왔다고 하자 손권은 오군이 촉으로 침공하지 못하게 하려고 제갈량이 세객(說客)을 보낸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전 앞뜰에 큰 가마솥을 걸고 기름 수백 근을 부어 펄펄 끓이게 했다. 그리고 궁문에서 대전까지 이어지는 연도 양 옆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무사 1천명이 칼과 창을 들고 서있게 한 다음 등지를 불러들였다.
궁문에 들어선 등지는 살벌하게 서 있는 무사들과 펄펄 끓는 기름 솥을 보고 옛 유방의 모사 역이기의 고사(故事)를 떠올리며 ‘겁을 줘서 나를 떠보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등지가 미소를 띠며 꼿꼿이 서서 들어오자 손권은 ‘당장 저놈을 기름 솥에 처넣어라!’ 하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등지가 말했다.
“오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다고 하던데 어찌 저 같은 필부가 두려워 이 야단법석입니까? 저는 오의 이해득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을 뿐이오.”
그러자 손권은 문득 자신이 촉의 사신을 너무 박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사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등지를 전에 오르게 한 다음 ‘오의 이해관계가 어떤지 고견을 들려주시오.’ 하고 말했다. 등지가 찬찬히 말문을 열었다.
“만일 촉이 위의 공격을 받아 패망한다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오가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 위의 신하가 되신다면 몸을 굽혀 위 조정에 입조하셔야 되고 태자는 당연히 볼모로 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촉과 오가 순치지세(脣齒之勢)를 이루어 함께 한다면 능히 위를 정벌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삼국이 솥발처럼 정립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마친 등지는 ‘촉오의 우호를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치겠다.’며 일어서서 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손권은 급히 막아서게 하고 ‘그대의 말이 맞소.’ 하며 등지를 다시 전 위로 오르게 했다. 손권은 위와 관계를 끊고 촉과 동맹을 맺겠다면서 학식이 뛰어난 장온을 답례사로 보내 함께 촉오동맹을 추진토록 했다.
등지는 촉으로 돌아와 오의 사신 장온과 함께 후주 유선을 알현하면서 손권의 동맹의지가 확고함을 알린다. 장온은 귀국하기 전날 제갈량이 마련한 환송연에서 술이 취해서인지 촉의 대신들을 깔보는 듯 오만하게 행동하는데, 그때 마침 촉의 저명한 학사 진복이 연회장에 들어왔다.
진복(秦宓), 자는 자칙(字勅)이고 문장이 뛰어난데다 유불선과 고금의 역사,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한 박학다식한 인물로 당대의 재사라는 칭송을 들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발탁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는다며 오를 침공하려 하자, 천시(天時)가 불리하다며 적극 말리다가 유비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기도 했다. 제갈량이 다시 발탁하여 벼슬을 내렸다.
두 석학이 나란히 앉았으니 당연히 담론이 펼쳐졌다. 장온이 ‘하늘에 머리가 있소? 귀가 있소?’하고 묻자 진복이 경전을 인용하며 청산유수로 답을 했다. 다시 장온이 ‘하늘에 성(姓)이 있소?’ 하고 물었다. 진복이 ‘당연히 있지요. 황제의 성이 유 씨니까 하늘의 성도 유(劉) 씨지요.’ 하고 답했다. 촉의 정통성을 강조한 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장온이 다시 ‘해는 동쪽에서 뜨지 않소이까?’ 하고 반문했다. 오가 동쪽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진복이 빙그레 웃으며 ‘해는 동쪽에서 뜨지만 반드시 서쪽으로 떨어지지요.’ 하고 답했다. 촉이 서쪽에 있음을 다시 상기시킨 것이다.
이번에는 진복이 태고적 혼돈과 음양에 대해서 묻고, 다시 천문 지리에 관한 질문을 하자, 장온이 대답을 못하고 ‘촉에 이런 기재(奇才)가 있는 줄 몰랐소. 한 수 가르쳐 주시오.’ 하며 꼬리를 내렸다.
장온을 따라 다시 오로 건너간 등지는 손권을 알현한 자리에서 촉오동맹을 매듭짓는다. 이로써 제갈량은 오에 대한 근심을 지우고 위를 공략하는 북벌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위한 장기 포석으로 먼저 남만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등지는 제갈량의 제1차 북벌 때 선봉장을 맡은 노장 조운과 함께 여러 전장을 누비며 활약하다가 제갈량 사후에는 거기장군을 지내며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74세가 되는 251년에 사망했다. 진복은 지금의 농림부장관인 대사농을 지내다가,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제갈량이 죽기 8년 전인 226년에 세상을 떴다.
등지와 진복, 이릉대전의 참패로 피폐해진 촉이 다시 일어서는 발판이 된 촉오동맹을 성사시킨 일등공신으로 기억될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