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에 오두미도를 전파한 교주 ‘장로’
한중에 오두미도를 전파한 교주‘장로’
최용현(수필가)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삼국지의 인물이 누구일까?’ 하고 물어보면 틀림없이 문신 공자와 나란히 무신으로 숭앙을 받는 관우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서울지하철 1호선 ‘동묘앞’ 역의 동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의 이름이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 관우에 필적할만한 영향력을 지닌 삼국지 인물이 한 사람 더 있다. 오두미도의 초대 교주 장로(張魯)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중지방을 다스린 2류 혹은 3류 정도의 군웅으로 나오지만, 현대 중국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력은 결코 관우에 뒤지지 않는다.
도교의 뿌리를 찾아가보면 후한 말의 태평도와 오두미도의 양 갈래로 나눠진다. 태평도는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면서 거의 소멸되어 맥이 끊어졌고, 오두미도는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 계승 발전되어 현대까지 뚜렷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초창기 도교인 오두미도의 발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바로 장로이다.
후한 말, 장로의 조부 장릉은 서촉(익주)에서 도를 터득하여 여러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민생고도 해결해주었는데, 누구든 쌀 5말[五斗米]를 내면 신도로 받아주는 오두미도의 시조가 되었다. 장릉이 죽자 아들 장형이 뒤를 이었고, 장형이 죽자 다시 아들 장로가 뒤를 이었다. 익주목 유언은 장로에게 한중(漢中)을 공략하게 했다.
한중을 평정한 장로는 그곳에 눌러 앉아 오두미도를 전파하는 교주가 되었다. 신도들은 소정의 수행과정을 거쳐서 좨주(祭酒)가 되는데, 장로는 이들 좨주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아 한중의 관리로 임용했다. 익주목 유언이 죽고 그의 아들 유장이 뒤를 잇자 장로는 익주와의 관계를 끊고 한중을 오두미도를 기반으로 하는 제정일치의 종교왕국으로 만들었다.
유장은 불같이 노하였으나 한중을 무력으로 정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서촉에 남아있던 장로의 어머니와 가솔들을 모두 참살했다. 중앙 조정에서도 한중이 워낙 멀고 오지여서 무력으로 정벌하기보다는 회유책을 썼다. 한중을 한녕으로 이름을 고쳐서 장로를 한녕태수로 봉하고 공물을 바치게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조는 한중의 북쪽울타리인 서량지역을 평정하고 마초를 쫓아냈다. 이제 다음 차례는 한중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장로는 막료들을 불러 놓고 ‘조조는 이제 우리 한중을 노릴 것이다. 차제에 나는 한녕왕이 되어 조조와 싸우고자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하고 물었다. 참모인 염포가 말했다.
“한중은 10만 가구가 넘습니다. 또 마초가 패망한 후 서량 백성들 수만 명이 한중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군량이 풍부한데다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 조조가 쉽게 침범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유장부터 쳐서 서천 41주를 손아귀에 넣은 후에 한녕왕이 되어 조조와 맞서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는 염포의 의견이 옳다 싶어 아우 장위와 함께 서천정벌을 준비했다. 어머니를 죽인 유장을 공략하여 원수를 갚고 익주 전체를 온전히 차지한 다음, 조조와 결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한중의 장로가 쳐들어올 준비를 한다는 첩보는 익주목 유장에게도 전해졌다. 어리석고 아둔한 유장은 막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형주의 유비가 종친이고 어진 인물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낸다. 제갈량의 천하3분지계에 따라 호시탐탐 서촉을 노리고 있던 유비는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서촉으로 향한다.
유장과 유비, 처음엔 서로 호형호제하며 잘 지냈으나 차차 틈이 벌어진다. 유비가 군사와 군량 지원을 요청했는데 막료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친 유장이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자 화가 난 유비는 칼을 거꾸로 들고 서촉을 점령해나간다. 다급해진 유장은 이번에는 한중의 장로에게 유비군을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이 장로의 원수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이때, 한중의 장로에게 의탁하고 있던 마초는 자신이 가서 유비를 사로잡고 유장에게서 서천의 20고을을 할양받아오겠다고 자원한다. 장로는 마초의 용맹을 잘 아는지라 군사 2만 명을 마초에게 내준다. 마초는 유비군의 용장 장비와 격전을 벌이지만 결국 제갈량의 계책에 빠져 유비에게 귀순하게 되고 서천은 완전히 유비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조조의 대군이 한중으로 쳐들어왔다. 장로는 험준한 양평관에서 저항하다가 맹장 방덕을 내보내지만 조조의 계책에 말린 방덕은 조조에게 항복해버린다. 이때 장위가 부고(府庫)와 곡물창고를 모조리 불사르고 달아나자고 했지만 장로는 부고와 창고는 국가의 재산이니 보존해야 한다며 불태우지 않고 봉인만 해놓고 파중으로 후퇴한다.
장로는 파중에서 다시 저항해보지만 역부족을 느끼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는 장로가 부고를 태우지 않고 봉인한 조치를 높이 평가하여 예를 갖추어 우대한다. 장로에게 진남장군의 직위를 내리고 낭중후로 봉한 후 용호산 일대에 식읍 일만 호를 준다. 그 덕분에 용호산은 장로의 거점이 됨과 동시에 오두미도의 본산이 된다.
이후 오두미도는 사마염에 의한 삼국통일과 그 후의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천사도(天師道)로 발전한다. 천사도에서는 장로를 장천사(張天師)라 칭하며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천사도는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다시 정일교(正一敎)로 이름이 바뀌어 주로 강남을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생각건대, 태평도는 교주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면서 거의 소멸되어버렸지만, 오두미도는 장로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장로가 양평관에서 패퇴할 때 부고와 곡물창고를 불태워버렸으면 오두미도를 전파하기는커녕 제대로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었겠는가.
마지막으로 관우와 장로의 영향력을 비교해보자. 관우에 대한 신앙은 종교라기보다는 기복신앙에 가까워 민간에 미치는 영향력의 넓이에서는 분명히 관우가 장로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회교가 발붙이지 못하는 현대 중국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과 인구수를 감안하면 교리를 바탕으로 한 영향력의 깊이에서는 관우가 장로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