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한 강골의 문사 ‘왕윤’
고지식한 강골의 문사 ‘왕윤’
최용현(수필가)
사도(司徒) 왕윤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광포한 독재자 동탁의 전횡에 비분강개하며 꺼져가는 한(漢)의 제실을 회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고군분투한 한(漢)의 충신이다. 처음엔 청년 조조로 하여금 동탁을 암살하도록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자신의 아리따운 수양딸 초선을 이용한 미인계를 성공시켜 마침내 동탁을 처단한다.
동탁이 왕윤의 연환계(連環計)에 걸려 여포에게 주살 당하자, 조정의 대권은 자연스럽게 왕윤에게 돌아간다. 동탁 사후의 뒷마무리를 진두지휘한 왕윤이 그 혼란기를 어떻게 수습하는지 살펴보고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평가를 해보는 것은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되리라 생각된다.
왕윤은 가장 먼저 동탁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에 착수했다.
왕윤이 동탁의 시신을 도심 한복판에 던져놓게 하자 장안의 백성들이 모두 뛰쳐나와 춤을 추며 환호를 했다. 동탁의 머리를 떼어내어 축구공처럼 찼고 그의 목 없는 시신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붙이자 얼마나 비만했던지 기름이 끓어내려 땅바닥에 흥건히 고였다고 한다. 왕윤은 동탁에게 온갖 못된 지혜를 내준 모사 이유를 거리로 끌어내 목을 베게 했다.
왕윤은 다시 미오성에 있는 동탁의 가솔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전 재산을 몰수하도록 조치했다. 이때 미오성을 지키고 있던 동탁의 수하장수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은 동탁이 죽자 곧 여포가 쳐들어 올 것을 알고 군사들을 이끌고 근거지인 서량으로 달아났다. 미오성에 당도한 여포는 초선부터 찾았지만….
동탁의 어미와 동생, 조카는 참수되었고, 죄 없이 미오성에 끌려가 동탁 일가의 시중을 들던 양민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미오성에 있는 재물을 거둬들이니 온갖 비단과 값비싼 구슬 등 보물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황금과 백금만도 각각 수십만 근씩 나왔다. 또 동탁 휘하의 군사들이 20년이나 먹을 군량미도 나왔다. 왕윤은 이들을 모두 국고에 귀속시켰다.
왕윤이 두 번째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동탁에게 빌붙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의 처단 문제였다. 때마침 조정에서 한실(漢室)의 회복을 자축하는 잔치를 열었을 때 동탁의 시신 앞에서 시중 채옹이 엎드려 울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왕윤은 채옹을 잡아들이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역적이 죽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한의 신하로서 기뻐하기는커녕 울고 있었느냐? 그러고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채옹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제가 한때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그의 참혹한 최후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적을 섬겨 국사를 그르치게 한 죄 죽어 마땅하오나, 바라건대 목숨만 부지하게 해주셔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한사(漢史)’ 집필을 마무리 하게 해주십시오.”
충심어린 간청이었다. 그러나 왕윤은 ‘지금처럼 어지러운 시기에 어용학자로 하여금 사서를 쓰게 하면 틀림없이 우리들을 비방하는 글을 남길 것’이라며 기어이 그를 죽이고 만다. 왕윤은 동탁의 위세에 기대어 악행을 저지른 다른 부역자들도 이에 준하여 단호하게 처단한다.
왕윤이 세 번째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동탁의 잔당들의 처결 문제였다.
남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들의 근거지인 서량으로 도망쳤던 이각과 곽사 등은 조정에 사자(使者)를 보내 용서를 구하며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왕윤은 이각과 곽사, 장제, 번조 네 사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사자를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네 장수는 각자 흩어져서 살길을 찾기로 했다. 이때 이각의 휘하에 있던 모사 가후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량사람들을 모아 장안으로 쳐들어가서 동탁의 원수를 갚고 대권을 잡는 것이 낫겠소. 잘 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못 되면 그때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들은 ‘왕윤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동탁의 근거지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동탁의 원수를 갚자고 선동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서량의 주민들이 이각과 곽사의 군문(軍門)으로 속속 몰려들어 순식간에 군사가 10만 명이 넘었다.
이각과 곽사 등이 군사를 나누어 일부는 도성 장안을 기습하였고, 일부는 궁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궁성 밖에서 이들과 싸우고 있던 여포는 왕윤을 구하기 위해 급히 궁성으로 들어와 속히 피신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왕윤은 끝내 고집을 부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지언정,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지는 않겠소.”
결국 여포는 왕윤을 두고 도성을 떠나버렸고, 이어 이각과 곽사의 무리들이 궁성으로 몰려가 왕윤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니 힘없는 어린 황제가 어쩌겠는가. 왕윤은 끌려 나가 주살 당하고 만다. 그의 가솔들도 모두 잡혀가서 참변을 당한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동탁을 제거한 것도 헛되이 조정의 대권은 다시 동탁의 잔당인 이각과 곽사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서 동탁을 처단한 후에 왕윤이 취한 조치들을 되짚어보자.
첫 번째, 전횡과 사치를 일삼던 동탁의 친족들을 죽이고 동탁이 미오성에 바리바리 쌓아놓은 재산을 몰수하여 사심 없이 국고에 귀속시킨 것은 올바른 처사로 나무랄 데가 없다.
두 번째, 마저 못해 동탁에게 협조한 채옹을 변절자로 단정하고 죽인 것은 너무 고지식하고 독선적인 처사로 생각된다.
세 번째, 동탁의 부하들이 항복을 청해왔을 때 지혜롭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강경 일변도로 나가다가 더 큰 화를 자초한 것과, 여포가 구원하러 왔을 때 일단 피했다가 후일을 기약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모하게 목숨을 버린 것은 선비다운 기개라기보다는 국정책임자로서 무책임한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도 왕윤. 동탁을 타도한 충신이었지만 뒷수습을 잘못하여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게 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최고 권력자의 유고로 빚어진 혼란기에 뒤처리를 맡은 국정책임자의 무능으로 더 큰 화를 자초하는 모습을 1980년 초에 우리나라에서도 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