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최용현(수필가)
1959년에 나온 ‘벤허’는 아카데미상 11개 부문 수상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아날로그 시대 최고의 명화이다. 30여 년 전에만 해도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TV에서 어김없이 ‘벤허’를 방영해주곤 했다.
2000년 작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벤허’와 여러 모로 닮은 영화이다. 고대 로마시대가 배경이라는 점, 주인공이 일약 노예로 전락하고 그의 가족들이 처참하게 몰락한다는 점, 운집한 관중들 앞에서 주인공이 복수를 한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다른 점은 ‘벤허’가 기독교 색채가 강한 영화로 해피엔드로 끝나는데 비해 ‘글래디에이터’는 종교와는 무관하며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글래디에이터’는 1억1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2년에 걸쳐 영국, 이탈리아, 몰타, 모로코 등에서 촬영한, 상영시간이 2시간 40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첫 장면부터 10분 정도 이어지는 게르마니아와의 전투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영국의 산 하나를 불태웠고, 검투경기가 열리는 콜로세움은 CG기술로 당시의 원형대로 복원했다.
고대 로마시대 5현제(五賢帝)의 마지막 황제이면서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만년에 죽음을 앞두고 자질에 문제가 있는 아들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 扮)대신 게르마니아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 막시무스(러셀 크로 扮)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한다.
이를 알게 된 코모두스는 아버지를 시해하여 황위를 찬탈한 뒤,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막시무스를 연모했던 코모두스의 누나 루실라(코니 닐슨 扮)는 동생의 패륜행위를 눈치 채지만, 자신의 외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코모두스에게 순종하는 체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막시무스는 고향집으로 달려가는데, 십자가에 묶여서 타죽어 있는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만다.
노예상에게 발견된 막시무스는 변방의 검노(劍奴) 상인에게 팔려서 검투사 훈련을 받게 된다. 검투는 상대를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검투경기에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검투사가 된 막시무스는 뛰어난 지혜와 발군의 무용(武勇)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한다.
한편, 코모두스 황제는 국정을 내팽개치고 연일 콜로세움에서 검투경기를 연다. 최고의 검투사가 되어 5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막시무스는 코모두스 황제가 보는 앞에서 매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민중의 영웅이 된다. 그 영웅이 막시무스임을 알게 된 코모두스는 치를 떨며 분노하지만 그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어 차마 죽이지는 못한다.
어느 날, 루실라가 검투사의 막사로 막시무스를 찾아와 원로원을 중심으로 코모두스를 죽이려는 거사를 도모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막시무스도 예전의 부하장수를 만나 그의 군사를 빌어 황궁에 진입하기로 하지만, 눈치 빠른 코모두스 황제에게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막시무스는 체포되고 루실라와 그의 아들도 위험에 처한다.
콜로세움의 대 관중 앞에서 막시무스를 죽여 영웅이 되고 싶었던 코모두스 황제는 양팔이 묶여 있는 막시무스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갑옷을 입혀서 상처를 가린 후 자신과 검투를 하게 한다. 계속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막시무스가 마지막 힘을 모아 코모두스의 목을 찌르자, 마침내 이 비열한 황제는 땅바닥에 고꾸라진다. 관중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 속에서, 달려 온 루실라의 품에 안긴 막시무스는 공화정을 원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훈을 전하고 숨을 거둔다.
‘검투사’를 의미하는 ‘글래디에이터’는 ‘에이리언’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로마시대극이다. 서기 180년경의 로마를 배경으로 장군에서 검노로 전락한 막시무스의 인생역정을 로마사의 실제 인물들 속에 용해시킨 웅장한 스케일의 블록버스터로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라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의상상, 음향상, 시각효과상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또 골든 글러브, MTV, 영국아카데미 등 여러 영화제에서도 작품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에서만 132만 명의 관객이 함께 했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성장한 러셀 크로는 로마시대의 검투사를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20kg이나 감량하고 몸을 만들어 혼신을 다해 촬영에 임했다. 호주 정부는 그를 초청하여 기념연설을 하게 했고, 그의 사진을 넣은 기념우표까지 발매했다. ‘벤허’의 주인공 ‘찰턴 헤스턴’처럼 그의 이름도 이 영화와 함께 오래오래 기억되리라.
코모두스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는 실감나는 싸이코 연기를 보여주었고, 누나로 나오는 코니 닐슨은 막시무스와 코모두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관객들을 끝까지 마음 졸이게 한다. 또, 검노상인 역을 맡은 원로배우 올리버 리드는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사망하는 바람에 이 영화가 그의 유작(遺作)이 되고 말았다. 2분여 남은 그의 연기 장면은 CG와 대역으로 마무리했다.
코모두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정말로 시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마사의 관련 부분을 찾아보았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만년에 자신이 죽은 것으로 잘못 알고 시리아 지역에서 황제를 칭한 반란이 일어나자 놀란 나머지 자질이 부족한 아들 코모두스를 갑자기 제2황제(후계자)로 지명한다. 그러나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역사를 왜곡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코모두스 황제가 검투사에게 살해된 것은 사실일까? 코모두스는 폭군 네로처럼 원로원을 무시하면서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고 검투와 환락에 빠져 민생을 도외시하다가 집권 12년 만에 근위대장의 사주를 받은 검노에게 암살당한다. 영화의 주인공 막시무스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조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벤허’처럼 행복한 결말을 원했지만, 막시무스는 복수를 하고 자신도 숨을 거둔다. 어쩌면 죽어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곁으로 가는 것, 그것이 막시무스에게는 해피엔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