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캅
로보캅(RoboCop)
최용현(수필가)
매월 8만부가량 발행되는 협회지인 ‘전력기술인’과 종합문예지 ‘한국문학예술’에 몇 년째 영화에세이를 연재하게 되면서 자주 듣는 질문이 생겼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뭐예요?”
“재미있는 영화 좀 추천해주세요.”
처음엔, 그때그때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을 추천하곤 했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다보니 답변에도 노하우가 생겼다. 인터넷 카페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혹은 학교 친구나 후배들에게는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영화를 일러주게 된다. ‘빠삐용’, ‘죠스’, ‘사관과 신사’, ‘영웅본색’, ‘쥬라기 공원’, ‘타이타닉’, ‘글래디에이터’….
그러나 묻는 사람이 지역 문인협회나 문학단체에서 만난 시인이나 작가인 경우에는 아무래도 작품성이 뛰어나고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를 추천하게 된다. ‘금지된 장난’, ‘젊은이의 양지’, ‘기적’, ‘초원의 빛’, ‘남과 여’, ‘라이안의 처녀’, ‘붉은 수수밭’, ‘시네마 천국’….
오늘은 이들 중에서 전자에 더 가까운,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1987년 크리스마스이브 심야에, 당시 국내 최고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던 충무로 대한극장 70mm 스크린에서 영화 ‘로보캅(RoboCop)’이 개봉되었다. 그리고 겨우내 극장 앞에는 표를 사는 줄이 이어져 이듬해 2월말까지 서울에서만 46만 명이 입장하는 빅히트를 했다. 아울러 비디오 게임, 만화, 장난감, 티셔츠 등 부가상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가히 ‘로보캅 신드롬’이 일었다.
이 영화는 갱들에게 살해당한 한 경찰관이 로보캅으로 부활하여 복수를 하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인데, ‘로보캅’의 시나리오를 훑어본 감독 후보자들은 한결같이 ‘제목과 스토리가 너무 유치하다.’며 연출을 맡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없이 네덜란드의 폴 버호벤 감독을 할리우드로 불러들여 연출을 맡겼다.
주인공인 로보캅 역을 맡을 배우로는 처음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영웅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검토했으나, 거구인 그에게 로봇 의상을 입히면 괴물이 될 것 같아 제외되었다. 결국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니고 있으면서, 로봇 의상 밖으로 드러나는 유일한 부분인 턱이 잘 생긴 피터 웰러가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다.
머지않은 미래인 2010년, 공업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 연일 흉악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시에서는 다국적 기업 OCP에 치안을 맡기기로 한다. OCP에서는 중역 딕 존스의 주도로 강력한 로봇경찰 ED-209를 개발했으나, 시연회 때 기관총이 오작동을 일으켜 간부 한 사람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하자, OCP 회장은 ‘로보캅 프로젝트’로 눈을 돌리게 된다.
어느 날, 경찰관 머피(피터 웰러 扮)는 파트너인 여경 루이스(낸시 앨런 扮)와 함께 악명 높은 클라렌스(커트우드 스미스 扮) 일당을 뒤쫓는데, 머피가 혼자 아지트에 잠입하다가 이들 일당에게 처참하게 난사(亂射) 당해 쓰러진다. OCP 연구원들은 방금 숨이 멎은 머피의 몸에 티타늄을 씌워 로봇으로 만들고, 기억장치에 경찰 프로그램을 집어넣어 첨단 사이보그로 부활시킨다. 로보캅이다.
범죄 소탕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던 로보캅은 자신이 살해당하던 순간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내고 옛집을 찾아간다. 집은 텅 비어있고, TV 모니터에서는 집을 팔기 위해 만든 광고가 나온다. 로보캅은 주먹으로 모니터를 박살내며 분노를 표출한다.
로보캅은 클라렌스 일당의 뒤를 봐주는 딕 존스를 체포하기 위해 중역실에 올라가지만, OCP 간부는 체포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기 때문에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결국 로보캅은 ED-209에게 무참히 얻어맞고 지하로 쫓겨나는데, 거기서도 딕 존스의 사주를 받은 경찰들의 무자비한 총탄세례로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동료 루이스에 의해 구출된다.
루이스의 도움으로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한 로보캅은 강력한 화력의 기관포를 입수한 클라렌스 일당의 습격을 받지만, 이들을 차례차례 처치하고 OCP 본사로 향한다.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ED-209를 단숨에 요절낸 로보캅은 곧바로 중역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회의장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딕 존스가 획책한 음모를 담은 영상을 보여주고, 그를 사살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폴 버호벤 감독은 사이보그 경찰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박진감 넘치는 역동적인 화면에 담아내면서 잔혹한 폭력 사이사이에 허를 찌르는 위트를 삽입하는 등 뛰어난 연출실력을 발휘하여 당당히 특급상업영화 감독의 반열에 올라선다. 이어 ‘토탈 리콜’(1990년)과 ‘원초적 본능’(1992년)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로보캅’은 무더운 여름에 촬영됐는데, 로보캅 의상이 두꺼운 철판이어서 의상 속의 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주인공 피터 웰러가 땀을 너무 많이 흘리는 바람에 의상 안에 냉각장치를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로보캅 의상을 다 입고는 운전석에 앉을 수가 없어서 운전 장면은 상반신만 로봇 의상을 걸친 미디엄 쇼트로 찍었다.
이 영화의 성공요인 중에서 첫 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로보캅에 맞서 싸우는 범죄조직의 두목 클라렌스 역을 맡은 커트우드 스미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이다. 자칫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로보캅의 싱거운 원맨쇼로 끝나기 십상인 이 영화에서 끝까지 균형을 유지하고 긴장감을 살려낸 일등공신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머피가 악당들에게 살해된 것은 유태인들에게 희롱당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떠오르게 하고, 로보캅으로의 탄생은 예수의 부활을 연상시킨다. 동료 여경 루이스는 막달라 마리아를, 클라렌스와의 최후의 결전에서 로보캅이 공사장의 물웅덩이를 걷는 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를 생각나게 한다. 지나친 비약일까?
마지막에, OCP 회장이 자신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던 딕 존스를 해고한다고 말하자마자 로보캅이 귀신같은 솜씨로 딕 존스를 사살하는데, 회장이 ‘솜씨 좋군. 자네 이름이 뭔가?’ 하고 묻자, 로보캅이 ‘머피’라고 대답하며 씩- 웃는다. 이때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던 것을 보고 덩달아 박수를 치던, 20여 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