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세이

라이언의 처녀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6. 17:43

라이언의 처녀(Ryan's Daughter)

 

최용현(수필가)

 

   ‘가깝고도 먼 나라하면, 우리에게는 가장 먼저 일본이 떠오른다.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아일랜드와 이웃인 영국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13세기,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침공하면서부터 두 나라 사이에 불편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1534년에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성공회(신교)가 로마가톨릭(구교)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가톨릭을 버릴 것을 강요하여 두 나라 간에 종교 갈등까지 생겨났다. 1921년 드디어 아일랜드가 오랜 투쟁 끝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북동부지역인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구교 세력과 영국 잔류를 원하는 신교 세력 간에 투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와 별도로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독립투쟁조직(IRA)의 유혈테러도 간간이 일어나고 있다. 1998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지금도 두 나라 사이에는 깊은 앙금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라이언의 처녀(Ryan’s Daughter)’는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한창이던 20세기 초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상영시간이 3시간 30분에 달하는 대하드라마 같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때 ‘daughter’를 왜 이라고 하지 않고 처녀로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관객동원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을 한 것일까?

   마을의 술집 주인 라이언의 딸 로지(사라 마일즈 )가 들고 있던 하얀 바탕의 줄무늬 양산이 해변의 절벽 아래로 꽃잎처럼 너울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카메라가 쫓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예쁘고 발랄한 처녀 로지는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찰스 선생님(로버트 미첨 )이 부인과 사별하자,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한다.

   결혼과 성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가졌던 로지는 신혼 첫날밤부터 찰스와의 부부관계에서 실망한다. 찰스가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데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신혼살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로지는 늘 허전하고 무료하다.

   그 무렵, 이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수비대장으로 랜돌프 소령(크리스토퍼 존스 )이 부임해온다.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약간 절지만 젊고 잘 생긴 유부남이다. 출타한 아버지 대신 로지가 술집을 지키고 있을 때 그가 찾아온다. 서로에게 마음이 끌린 두 사람, 바로 격렬한 키스를 나눈다.

   두 사람은 대낮에 만나 산책도 하고 숲속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등 밀회를 계속한다. 밤에 남편 찰스가 잠든 사이에 몰래 나가서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로지의 들떠있는 모습을 보고 찰스가 눈치를 채게 되고, 급기야 마을사람들까지도 둘의 불륜을 알게 된다.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날, 반영(反英) 운동을 하는 레지스탕스들이 밀수한 무기 박스가 해안에 도착한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억수같이 퍼붓는 비바람 속에서 박스가 부서져 흩어져버린 무기를 찾아 건져 올리지만, 랜돌프 소령이 이끌고 온 영국군 수비대에 의해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모두 체포되고 무기는 압수당하고 만다.

   마을사람들은 로지가 밀고자라고 생각하고 떼로 몰려가 그녀를 발가벗겨 구타한 뒤 머리카락을 마구 잘라버린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휴 신부(트레버 하워드 )가 나서서 말려보지만 마을사람들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사실은 로지의 아버지가 주둔 영국군의 끄나풀이었고, 그가 밀고를 했던 것인데.

   영화는 이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적장(敵將)과 바람을 피운 유부녀의 이야기가 해피엔드로 끝날 수는 없다. 로지가 겪은 고초가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랜돌프 소령은 자폭(自爆)을 하고, 로지와 찰스 부부는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지어진다.

   이 영화는 콰이강의 다리’(1957),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닥터 지바고’(1965) 등을 연출하여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1970년에 만든 작품이다. 70mm 대형 화면에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아름답고 장엄한 풍광을 배경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목가적인 시선으로 담았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고, 그 해일이 집채만 한 물기둥을 이루며 포말이 되어 부서지는 장면, 엄청난 파도와 용솟음치는 풍랑 속에서 마을사람들이 무기를 건져 올리는 장면 등은 요즘의 디지털로 만들어낸 화면과는 차원이 다른 아날로그 스펙터클의 진수를 보여준다. 촬영감독 프레디 영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였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잔잔하게 깔리는 모리스 자르의 분위기 있는 음률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곳곳에 등장하는 서정적인 멜로디도 그렇거니와, 로지의 남편 찰스가 틈만 나면 축음기를 틀어놓고 듣는 베토벤의 교향곡들도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영국의 적대국인 독일 출신 베토벤의 음악은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데.

   불륜에 빠진 아내를 지켜보는 고통을 안으로 삭이는 로버트 미첨과, 신부 역을 맡아 시종 묵직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트레버 하워드, 두 중년배우의 중후한 연기가 이 영화를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다. 또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존 밀스의 바보 연기는 어디서 진짜 바보를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히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여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뉴욕비평가협회의 초대를 받아 미국을 방문한 데이비드 린은, 그곳 평론가들이 혹평 일색의 감상평을 내놓자 쓰러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그 때문인지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1984인도로 가는 길을 연출할 때까지 그가 14년간 영화에서 손을 뗀 것만으로도 그 충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영화가 왜 그런 혹평을 받았는지 쉬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이언의 처녀는 와이드 화면에 담은 아일랜드 해안의 수려한 풍광만으로도 분명 재평가되어야 할 명작이다. 한 평론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라이언의 처녀는 거장 데이비드 린이 연출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는 아닐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