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물열전

후한 왕조의 종착역 ‘마지막 황제’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5. 19:00

후한 왕조의 종착역 마지막 황제

 

최용현(수필가)

 

   역사를 돌아보면, 망해가는 왕조에는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외척이나 환관의 발호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이 세운 2백년의 제업(帝業)은 외척인 왕망에게 찬탈을 당했고, 다시 광무제 유수에 의해 중흥된 후한 2백년의 제업도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삼국지의 서장이 열리는 계기가 된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은 외척과 환관의 매관매직에 따른 국정문란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열일곱 살에 즉위한 후한 13대 소제(少帝)는 외숙부인 대장군 하진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겨우 5개월 만에 동탁에게 폐위되어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14대 헌제(獻帝)는 폐위된 소제의 이복동생으로, 아홉 살에 동탁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189). 군부 실력자에 의해 황제가 폐위되고 새 황제가 옹립된 이때 이미 후한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으리라. 후한 마지막 황제의 옹립에서부터 폐위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누이를 황후로 둔 덕분에 벼락출세하여 대장군이 된 하진이 환관들에 의해 목숨을 잃자, 이에 분개한 원소 원술 등 젊은 무관들은 궁궐을 습격하여 환관들과 그 가솔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하는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 난리통에 소제는 이복동생인 진류왕과 함께 피신, 낙양 교외의 민가를 전전하게 된다.

   그때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어가(御駕)를 가로막고 섰다. 군마 속에서 한 장수가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서량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대군을 이끌고 온 동탁이었다. 겁에 질린 황제 대신 아홉 살 난 진류왕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대는 어가를 보호하려고 왔는가, 아니면 탈취하려고 왔는가?”

   어린 소년의 매서운 질책에 놀란 동탁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 어가를 호위하러 달려오는 길입니다.”

   진류왕이 다시 소리 높여 꾸짖었다.

   “그렇다면 어찌 말에서 내려 황제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가?”

   동탁은 완전히 기가 죽어 황망히 말에서 내려서며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 일행은 동탁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어린 소년 진류왕은 이처럼 총명하고 영특했다. 조정의 대권을 잡은 동탁은 마음대로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총명한 것이 마음에 좀 걸리긴 해도 이제 겨우 아홉 살이니. 그가 바로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이다.

   공포정치로 국정을 전단(專斷)하던 동탁은 각지의 군웅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쳐들어오자, 낙양을 불태우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어린 황제는 동탁이 하자는 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동탁이 여포의 손에 참살 당하자, 이번에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과 곽사가 대권을 나누어가졌다.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여 싸우기 시작하자, 황제는 난리를 피해 낙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때 산동에서 세력을 기르고 있던 조조를 부른다.

   조조가 이각과 곽사를 패퇴시키자 정국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황제도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각지의 군웅들을 차례차례 토벌하면서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조조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황제를 업신여기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성년이 가까워진 황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 귀비의 아버지인 국구(國舅) 동승에게 손가락을 깨물어서 쓴 혈서를 주며 조조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황제의 밀조(密詔)를 받은 동승은 유비 마등 길평 등의 동조자를 얻어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계획이 사전에 탄로 나는 바람에 모두 잡혀 주살되고 만다. 유비만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격분한 조조는 황제의 아이를 수태하고 있던 동 귀비까지 목매달아 죽이고, 황제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킨다. 황제가 하루하루 조조의 눈치를 보며 고통스럽게 살아가자, 이를 보다 못한 복 황후는 아버지인 복완에게 조조를 없애라는 밀서를 보낸다.

   그러나 이 또한 조조의 정보망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 계획이 발각되자, 복 황후는 노기충천한 조조에 의해 몽둥이로 맞아 죽는 참변을 당했고, 그녀가 낳은 두 황자(皇子)는 물론 3족까지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황제가 두 번이나 외척의 힘을 빌어 조조에게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조조는 자신의 딸을 황제와 강제로 결혼시켜 스스로 국구가 되었다. 황제는 이제 완전히 기력을 잃고 조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다.

   조조는 황제로부터 위공(魏公)에다 구석(九錫)의 특전까지 받아내더니 다시 위왕으로 올라섰다. 이제 조조는 마음만 먹으면 허수아비 황제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끝내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후세에 찬탈자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리라.

   조조가 죽고 위왕의 지위를 계승한 맏아들 조비가 황제를 겁박하자, 힘없는 황제는 겁에 질려 제위를 내주고 말았다. 선양(禪讓)이라는 이름으로 조조의 아들에게 제위를 빼앗긴 마지막 황제는 산양공(山陽公)으로 강등되어 단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그리고 새 황제 조비에게 무릎을 꿇리는 수모를 당하고 벽지로 쫓겨났다.

   “새 천자께서 인자하시기 때문에 그대를 죽이지 않고 산양공으로 봉하신 것이오. 그리 알고 속히 임지로 떠나되 부름이 없으면 결코 도성에 들어오지 마시오.”

   전한과 후한으로 이어져오던 한의 4백년 제업은 이렇게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막을 내리고 말았다(220). 아홉 살이던 마지막 황제가 즉위한 지 31년만이었다.

   한의 부흥을 위해 분골쇄신하던 유비는 한 제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촉의 황제로 즉위했고, 이어 오의 손권도 황제로 즉위했다. 바야흐로 위촉오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후한 마지막 황제에겐 시호가 하나 더 있다. 헌제는 천자 자리를 헌납했다고 해서 붙여진 시호이고, 일생 동안 근심에 묻혀 불행하게 살았다며 촉한의 유비가 정한 시호는 효민황제, 즉 민제(愍帝)이다. 황제 자리를 내주고 산양공으로 살아가던 그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