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할 용장 ‘장비’
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할 용장 ‘장비’
최용현(수필가)
정사이건 야사이건 사서(史書)는 문사에 의해 기록된다. 사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문사의 손에 의해 뛰어난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형편없는 망나니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그들이 남긴 글에 의해 그 인물을 평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문사는 무사를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문(文)을 항상 무(武) 위에 올려놓는 오래된 관행에다, 자신이 갖추지 못한 무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더해진 것이다. 글줄을 좀 읽은 무사는 그래도 좀 낫다. 글을 모르거나 출신이 비천한 무사는 이들의 좋은 표적이 되어 형편없는 사람으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익덕(翼德) 장비(張飛)가 아닌가 싶다. 관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의기와 무예를 갖추고도, 출신이 비천하고 무식하다는 이유로 후세에까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장비의 출신배경, 인상(人相)과 성격, 무용,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대목을 관우와 비교하면서 고찰해 보자.
우선 출신배경을 보면 관우는 서당 훈장 출신으로 식자층이고, 장비는 조그만 고을 현령의 무사 출신이다. 장비가 관헌을 죽이고 쫓기면서 한때 멧돼지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 이력 때문에 푸줏간 출신으로 알려져 무식한 망나니로 낙인찍히고 만다.
두 번째, 인상에서 관우는 선비형 무사로 묘사되어 있는 데 비해 장비는 돌쇠형(?) 무사로 묘사되어 있다. 넓은 이마, 누에눈썹, 봉안(鳳眼), 단정하고 긴 수염은 관우의 등록상표이고, 장비의 인상에는 일자눈썹, 치켜뜬 고리눈, 쭉쭉 뻗친 턱수염이 상표처럼 따라 다닌다.
세 번째, 성격상의 장단점을 살펴보자. 관우는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과 강직한 성품이 장점인 반면, 스스로를 과신하고 상대방을 깔보는 단점이 있었다. 또 정에 약해 손아귀에 들어온 조조를 옛정 때문에 놓아준 적도 있었다. 한 마디로 관우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비는 속과 겉이 똑같고 남을 의심하지 않는 장점(?)을 가졌으나, 조급한 성격에 술을 먹으면 난폭한 행동을 하는 단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장비는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에 주사(酒邪)가 있는 무뢰한으로 그려져 있다.
네 번째, 무용을 비교해 보자. 우선 무기의 주 종목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관우의 손에는 정통 무사의 이미지를 주는 칼(청룡언월도)이 쥐어진데 비해, 장비의 손에는 칼이 아닌 창(장팔사모)을 쥐게 하였다.
무용담을 보자. 관우가 조조진영에 머물고 있을 때 원소가 자랑하는 두 맹장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벤 적이 있었다. 조조가 그의 무용을 칭찬해 주자 관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승상, 무용에 있어서는 저의 아우인 장비가 저보다 위입니다. 장비는 전장에 나가면 적장의 목을 베어오기를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 합니다.”
관우가 스스로를 낮추려고 아우를 과대포장한 말이지만, 이 말은 관우가 장비의 무예를 최소한 자신과 동급 정도로 보고 있다는 증좌(證左)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을 들은 조조, 사모하는(?) 관우의 말인지라 간담이 서늘하여 휘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명을 내린다.
“너희들은 어디에다 장비의 이름을 적어놓고 기억하라. 앞으로 장비를 만나거든 섣불리 덤비지 마라.”
장비의 진가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쾌거일 것이다. 유비가 형주의 피난민들과 함께 후퇴하느라 조조군에 쫓기며 장판교 건너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이다.
조운이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를 구해 품에 안고 피투성이인 채 달려왔을 때, 장판교 다리 위에서 큰 창을 쥐고 조조의 대군에 맞서 단 일기(一騎)로 버티고 서있는 거한이 있었다. 장비였다. 장비는 조운을 유비가 있는 숲 속으로 보내고 혼자 말위에 버티고 서서 고리눈을 부릅뜨고 우레 같은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연인(燕人) 장비다. 누구든지 자신 있는 놈은 나와서 덤벼라!”
조조진영의 장수 하후걸이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단 일합에 목이 떨어졌다(장비의 고함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써진 책도 있지만.). 조조진영의 장수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기가 죽어 멈칫하고 있었다. 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조조가 황급히 영을 내렸다.
“퇴각하라. 그때 관우가 얘기하던 바로 그 장비이다.”
장비의 위풍당당한 기세가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물론 그 옆 숲속에 매복이 있을까봐 조조가 섣불리 공격명령을 내릴 수 없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장비의 용맹과 무용이 결코 관우에게 뒤진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 좀 가미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자. 패주하던 관우는 맥성에서 빠져나오다가 아들과 함께 오군에게 사로잡혀 오주 손권의 간곡한 회유를 물리치고 참수를 당함으로써 무사다운 죽음을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의 죽음에 흥분하여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이라는 이름의 두 부하에게 무리하게 출정준비를 시켰다가, 기한 내에 준비를 하지 못하여 장비한테 두들겨 맞을 일을 두려워 한 이들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세 사가들이 장비의 이름을 관우보다 한참 아래에 두게 된 것은, 관우가 전장에서도 항상 ‘춘추(春秋)’를 끼고 다니는, 문무를 겸비한 무장인 데 비해, 장비는 일자 무식꾼인 데다 주벽 때문에 큰일을 여러 번 그르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비 또한 관우의 죽음에 흥분, 제갈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오를 정벌하려다 참패하여 백제성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후세 사가들이, 촉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단초가 되는 유비의 판단착오마저도 관대하게 평가하면서도 장비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직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장비, 이제는 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18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레와 같은 명성으로 남아있는 유비와 관우만큼은 아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