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참칭한 명가의 적자 ‘원술’
황제를 참칭한 명가의 적자(嫡子) ‘원술’
최용현(수필가)
“만약에 내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황제와 왕, 제후를 사칭하며 세상을 어지럽혔을지 모른다.”
조조는 만년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된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 황제에 오르는 것을 필두로 촉의 유비, 오의 손권이 차례로 황제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조가 죽기 전에도 황제를 참칭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원소의 사촌동생 원술이다. 남양에서 군벌로 성장한 원술의 부침과정, 그리고 그가 조기에 패망한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원술(袁術), 자는 공로(公路). 예주 여남 출신으로 4세3공(四世三公)을 배출한 명가 출신의 적자(嫡子)라는 후광을 업고 남양에서 기업(基業)을 쌓을 수 있었다. 얼자(孼子) 출신인 사촌형 원소를 개무시했으나 용자(容姿), 도량, 안목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원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원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대립하며 원수처럼 지냈다.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17제후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 원술은 남양태수로서 가장 먼저 군마를 이끌고 와서 연합군의 군량과 마초(馬草)를 담당했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우려 하자, 원술이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등 협량(狹量)을 드러내어 제후들 간에 불화와 내분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제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고 마는데 공손찬은 북방의 유주를, 원소는 기주를, 조조는 연주를 차지하고 각자 야심을 가다듬으면서 힘을 키워나갔다. 원술은 남양에 근거를 두고 맹장 손책을 앞세워 세력을 확대해갔다. 남방 경략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슬그머니 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나의 시대가 온다. 한(漢)을 대신할 사람이 나 이외에 누가 있으랴!”
그때, 아들인양 가까이 두고 부려먹던 손책이 그의 아버지 손견에게서 물려받은 전국(傳國)의 옥새를 맡기면서 군마를 빌려 달라고 하자, 원술은 옥새에 혹해서 군사 3천 명과 말 5백 필을 내준다.
어느 정도 기반을 확립한 손책이 빌린 군사를 돌려주며 원술에게 옥새를 달라고 했지만, 오래 전부터 제위를 꿈꾸어오던 원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려주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또 원술은 그의 아들과 여포의 딸을 결혼시켜 유비를 견제하려다 실패하여 여포와도, 유비와도 원수가 되고 만다.
좌충우돌하던 원술, 옥새 가진 것을 기화로 수춘성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조조는 황제를 참칭하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는 한편, 강동의 손책과 서주의 여포, 그리고 유비에게도 군사를 내도록 요청했다. 드디어 조조 손책 여포 유비의 연합군이 수춘성을 포위했다.
이에 원술은 연합군의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수춘성 안에서 저항하도록 명하고 자신은 어림군을 이끌고 회수를 건너 피신했다. 조조는 도망치는 원술을 추격하지 않고 수춘성을 공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연합군은 한때 군량이 떨어져 고전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수춘성을 함락시켰다.
회남으로 피신한 원술이 계속 방탕을 일삼으니, 백성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결국 세력이 급격히 줄어든 원술은 그때서야 옥새를 사촌형인 원소에게 넘겨줄 생각을 했다. 이때 여포는 조조와 유비의 연합군에게 이미 평정되었고, 원술의 동맹자인 공손찬도 원소에게 패망하고 난 뒤였다.
유비는 조조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 원술을 치겠다고 자원했다. 조조가 이를 허락하자, 유비는 조조가 내준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서주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원소에게로 가는 원술을 공격했다. 서전에서 원술의 선봉장 기령이 장비의 창에 찔려 죽으니 사기가 땅에 떨어진 원술의 군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항복했다.
원술은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도망치다가 어느 조그만 성에 은거하는데, 얼마 안 있어 양식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황제랍시고, 끼니마다 잡곡밥이 나오니 도무지 밥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주방장에게 꿀물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원 참, 꿀물이 어디 있소? 핏물이라면 모를까.”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는 판에 꿀물을 찾으니 주방장도 이제 황제를 얕보고 빈정거렸다. 원술은 그 말을 듣자 울화통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무슨 말버릇이….”
그러다 푹 쓰러져 피를 토하더니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만다. 황제치고는 너무나 비참한 종말이었다. 그의 가솔들은 대부분 도적떼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고, 원소에게 바치려 했던 옥새는 결국 조조의 손에 들어가 원래의 주인인 후한 황제에게 되돌아갔다.
원술의 패망원인은 무엇보다도 난세를 헤쳐 나갈 자질이 부족한 데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외에도 크게 두 가지의 요인이 있다.
첫 번째, 난세에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때까지 한 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적보다는 동지가 더 많아야 하는데, 원술은 사방에 있는 군웅들을 모두 한꺼번에 적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가까이 잡아둘 수 있었던 손책을 잃더니, 원래 공손찬과 함께 자기편이었던 유비까지 적으로 만든 데다, 충분히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던 여포와도 원수가 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스스로 황제에 올라 조조의 비위까지 건드린 것이다.
두 번째, 조그만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그때가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인 점을 망각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것은 화를 자초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난세에 황제를 참칭하며 그렇게 호사스럽게 살아온 것을 보면 그의 정신상태가 온전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종형인 원소와 힘을 합쳐서 남북에서 조조를 협공했더라면 어쩌면 원소와 함께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원술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사치를 즐기고 음란, 방탕하여 그 끝이 좋지 못했으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불러들인 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