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및 콩트

월산거사와 백산거사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23:20

월산거사와 백산거사

 

최용현(수필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여섯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며칠 동안 고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어제 밤늦게 서울로 돌아와서 곤히 잠들어 있던 터였다. 수화기를 들었다.

   “어이 월산거사(月山居士). 아직 안 일어났냐?”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대학졸업 무렵부터 연락이 끊어진 고향친구 인철이였다. 대학시절 그는 내가 태어난 동네이름을 붙여 날 그렇게 불렀고 나 역시 같은 이유로 그를 백산거사(白山居士)’라 부르곤 했다.

   그도 며칠 전 여름휴가 때 고향에 들렀다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한다. 오늘 퇴근 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인철이와의 인연이 참으로 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다. 나는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입학식 날 학교 운동장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도 우리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문과(文科)였던 그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줄곧 같은 반이 되었다. 수학과목을 아주 싫어했던 우리는 둘 다 수학 때문에 본고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를 결심한 나는 후기응시를 포기하고 부산에 있는 한 학원에 등록했다. 그도 재수를 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예비고사를 얼마 앞둔 가을 어느 날, 고향집으로 인철이가 찾아왔다. 수학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우리는 수학 대신 국사를 선택할 수 있는 서울의 K대에 함께 응시하기로 했다.

   나는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다. 국어선생을 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법대에 응시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내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법대에 가는데 내가 어찌 국문학과에 갈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법대의 커트라인은 국문학과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법대 행정학과에 응시했고, 그는 법대에 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서 국문학과로 하향조정했다. 그는 나도 국문학과에 응시하는 줄 알았단다. 둘 다 합격을 했다. 그리하여 그와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까지 동창이 되었다.

   우리는 키와 몸무게까지 정확하게 같았고 생일은 내가 3일 빨랐으나 주민등록상의 생일을 들어 그는 늘 자기가 형이라고 우겼다. 서울에 와서는 학교 앞에 하숙집을 얻어 한 방에서 살았는데, 내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면서 드디어 헤어지게 되었다. 2학년을 마치고 군에 간 그가 복학한 3학년 때 우리는 다시 캠퍼스에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국문과 출신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는 국어교사로 진로를 굳혀가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직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정학과를 나오면 일반사회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영 마음 내키지 않아서 3학년 때 중단하고 말았다.

   나는 행정고시 준비를 할까 하다가 3학년 겨울방학 때 갑자기 결혼을 하는 바람에 취직시험 준비로 방향전환을 했고, 4학년 2학기인 10월에 시험 삼아 응시한 첫 공채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졸업하기 전인 111일부터 G생명에 다니게 되었다. 후에 들으니 그는 서울 OO여고의 국어교사가 되었단다.

   서로 연락이 끊긴 채 수년이 흘렀다. 나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갔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전부터 꿈꾸어오던 문학에의 열정이 조금씩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회사 사보에 매월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칼럼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내 글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승진시험을 거쳐 입사 35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되면서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 동안 본사 교육부에서 맡았던 교재 업무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영업소장으로서 영업을 독려하는 일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나는 좀 쉬기로 하고 사표를 냈다. 퇴직금으로 책을 잔뜩 사서 읽었고 습작도 열심히 했다.

   4년 후, 필기시험을 거쳐 한 학회 사무국의 중간간부로 들어가게 되면서 다시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거기서도 월간지에 칼럼을 썼고, 3년 후에는 몇 군데 문예지에 작품을 보냈다. 드디어 한 월간지로부터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를 한 것이다.

   지금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 월간지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그 동안 직장생활의 중압감에 시달릴 때마다, 글을 쓰면서 문학적 기초가 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대학에 들어갈 때 국문학과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여고에서 국어선생을 하고 있을 인철이가 부러웠다.

   퇴근길에, 우리 학회 사무실이 있는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인철이와 마주 앉았다. 아직도 여고에서 국어선생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도 체질에 맞지 않는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G생명과 라이벌 업체인 S생명에 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단다. 이런 걸 스토킹이라고 해야 하나, 질긴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입사하자마자 G생명에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으나 얼마 전에 퇴직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내가 그의 교직생활을 부러워했듯이 그도 내 직장생활을 부러워했단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직업과 직장에 만족하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교직생활이 늘품은 없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는 직업이라며 그가 서른여덟 살에 주례를 섰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직장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작년 가을, 제자 하나가 신랑 될 사람과 함께 집으로 찾아와 주례를 서달라고 하더란다. 처음엔 거절을 했지만 하도 끈질기게 부탁을 해왔기 때문에 결국 응낙을 했단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주례사 원고를 썼고, 그 원고를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연습을 하여 그날 주례사를 했다고 한다. 해보니 주례사 원고 쓰는 게 어려웠지 주례 서는 건 별게 아니더란다. 우리는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그 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헤어지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둘 다 멀리 돌아서 각자 제 자리를 찾은 거야. 넌 그때 국문학과에 들어갔어야 했고, 난 법대나 상대에 들어갔어야 했어. 그때 우리가 서로를 너무 의식한 결과 둘 다 오판을 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