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거사와 백산거사
월산거사와 백산거사
최용현(수필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여섯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며칠 동안 고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어제 밤늦게 서울로 돌아와서 곤히 잠들어 있던 터였다. 수화기를 들었다.
“어이 월산거사(月山居士). 아직 안 일어났냐?”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대학졸업 무렵부터 연락이 끊어진 고향친구 인철이였다. 대학시절 그는 내가 태어난 동네이름을 붙여 날 그렇게 불렀고 나 역시 같은 이유로 그를 ‘백산거사(白山居士)’라 부르곤 했다.
그도 며칠 전 여름휴가 때 고향에 들렀다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한다. 오늘 퇴근 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인철이와의 인연이 참으로 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다. 나는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입학식 날 학교 운동장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도 우리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문과(文科)였던 그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줄곧 같은 반이 되었다. 수학과목을 아주 싫어했던 우리는 둘 다 수학 때문에 본고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를 결심한 나는 후기응시를 포기하고 부산에 있는 한 학원에 등록했다. 그도 재수를 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예비고사를 얼마 앞둔 가을 어느 날, 고향집으로 인철이가 찾아왔다. 수학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우리는 수학 대신 국사를 선택할 수 있는 서울의 K대에 함께 응시하기로 했다.
나는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다. 국어선생을 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법대에 응시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내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법대에 가는데 내가 어찌 국문학과에 갈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법대의 커트라인은 국문학과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법대 행정학과에 응시했고, 그는 법대에 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서 국문학과로 하향조정했다. 그는 나도 국문학과에 응시하는 줄 알았단다. 둘 다 합격을 했다. 그리하여 그와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까지 동창이 되었다.
우리는 키와 몸무게까지 정확하게 같았고 생일은 내가 3일 빨랐으나 주민등록상의 생일을 들어 그는 늘 자기가 형이라고 우겼다. 서울에 와서는 학교 앞에 하숙집을 얻어 한 방에서 살았는데, 내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면서 드디어 헤어지게 되었다. 2학년을 마치고 군에 간 그가 복학한 3학년 때 우리는 다시 캠퍼스에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국문과 출신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는 국어교사로 진로를 굳혀가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직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정학과를 나오면 ‘일반사회’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영 마음 내키지 않아서 3학년 때 중단하고 말았다.
나는 행정고시 준비를 할까 하다가 3학년 겨울방학 때 갑자기 결혼을 하는 바람에 취직시험 준비로 방향전환을 했고, 4학년 2학기인 10월에 시험 삼아 응시한 첫 공채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졸업하기 전인 11월 1일부터 G생명에 다니게 되었다. 후에 들으니 그는 서울 OO여고의 국어교사가 되었단다.
서로 연락이 끊긴 채 수년이 흘렀다. 나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갔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전부터 꿈꾸어오던 문학에의 열정이 조금씩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회사 사보에 매월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칼럼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내 글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승진시험을 거쳐 입사 3년 5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되면서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 동안 본사 교육부에서 맡았던 교재 업무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영업소장으로서 영업을 독려하는 일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나는 좀 쉬기로 하고 사표를 냈다. 퇴직금으로 책을 잔뜩 사서 읽었고 습작도 열심히 했다.
4년 후, 필기시험을 거쳐 한 학회 사무국의 중간간부로 들어가게 되면서 다시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거기서도 월간지에 칼럼을 썼고, 3년 후에는 몇 군데 문예지에 작품을 보냈다. 드디어 한 월간지로부터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를 한 것이다.
지금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 월간지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그 동안 직장생활의 중압감에 시달릴 때마다, 글을 쓰면서 문학적 기초가 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대학에 들어갈 때 국문학과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여고에서 국어선생을 하고 있을 인철이가 부러웠다.
퇴근길에, 우리 학회 사무실이 있는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인철이와 마주 앉았다. 아직도 여고에서 국어선생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도 체질에 맞지 않는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G생명과 라이벌 업체인 S생명에 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단다. 이런 걸 스토킹이라고 해야 하나, 질긴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입사하자마자 G생명에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으나 얼마 전에 퇴직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내가 그의 교직생활을 부러워했듯이 그도 내 직장생활을 부러워했단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직업과 직장에 만족하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교직생활이 늘품은 없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는 직업이라며 그가 서른여덟 살에 주례를 섰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직장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작년 가을, 제자 하나가 신랑 될 사람과 함께 집으로 찾아와 주례를 서달라고 하더란다. 처음엔 거절을 했지만 하도 끈질기게 부탁을 해왔기 때문에 결국 응낙을 했단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주례사 원고를 썼고, 그 원고를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연습을 하여 그날 주례사를 했다고 한다. 해보니 주례사 원고 쓰는 게 어려웠지 주례 서는 건 별게 아니더란다. 우리는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그 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헤어지면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둘 다 멀리 돌아서 각자 제 자리를 찾은 거야. 넌 그때 국문학과에 들어갔어야 했고, 난 법대나 상대에 들어갔어야 했어. 그때 우리가 서로를 너무 의식한 결과 둘 다 오판을 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