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꿈
낮 꿈
최용현(수필가)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후, 나는 아동복이 주렁주렁 벽에 걸린 조그만 가게에서 의자에 앉아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명절이 코앞인데도 요즘 손님이 통 없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차라리 가게를 처분해버리고 보험설계사나 해볼까? 잘 하면 한 달에 수백만 원도 벌 수 있다는데….
내가 옷가게를 차린 것은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그달그달 생활비 충당하기에도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 정도지만, 애들이 좀 더 크면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내 집을 마련하려면 매월 주택부금도 넣어야 하는데…. 하여튼 돈을 더 벌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부업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남편을 설득해보기로 했다. 두 아이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은 시어머니께서 맡아서 해주시기로 이미 내락을 받은 터였다.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던 남편도 ‘애들 어릴 때 장사 한번 해보겠다는데 밀어줘봐라.’ 하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승낙을 했다.
드디어 남편이 회사에서 2천만 원을 융자받아 왔다. 나는 그 돈으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단지 입구 큰길가에 8평짜리 가게를 얻어 아동복점을 차렸다. 모자라는 돈은 월세로 돌렸다. 가게 내부도 예쁘게 꾸미고 팔 물건도 잔뜩 해 넣었다. 아동복을 택한 것은 마진이 좋다는 점과 이곳에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산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었다. 2, 3일에 한 번씩 새벽 2시에 일어나 동대문시장에 물건 사러가야 하는 것,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꼼짝없이 가게를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 동안 단골도 제법 많이 확보했고 또 매일 밤 10시에 오늘 얼마 벌었나 하고 결산하는 재미도 있었다. 월 평균수입은 거의 남편 월급에 육박했다.
그러나 겨울 들어 매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알아보니 우리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큰 건물이 하나 들어섰는데 그곳에 제법 큰 아동복점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아동복은 치수가 워낙 다양해서 구색을 다 갖추려면 매장이 넓어야 하는데 우리 가게는 좁은 것이 문제였다.
나는 단골손님을 뺏기지 않으려고 구입원가에 이문을 조금만 붙여서 팔았다. 그러다 보니 매상은 전과 비슷해도 수입은 절반 가까이 뚝 떨어졌다. 무슨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옆 가게를 더 얻어 확장해서 제대로 구색을 갖추느냐, 아니면 물건을 다 처분하고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느냐.
따뜻한 햇살 때문인지 살포시 졸음이 왔다. 그 때 중년부인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뭉칫돈 한 다발을 내 손에 쥐어주고는 그대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급히 따라 나가보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참 별 일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그들이 주고 간 돈다발을 세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졸고 계시네.’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문 앞에 서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졸다가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런데 옷차림새를 보니 조금 전 꿈속에서 만난 여자들과 흡사했다.
한 여자가 대여섯 살짜리 아이의 반코트와 바지 하나를 고르며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반코트는 8만 5천원, 바지는 2만 원’이라고 했더니 대뜸 현금 10만 원을 주며 ‘이거면 됐죠?’ 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함께 온 여자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요즘 장사 잘 안되죠?’ 하더니 가져온 가방을 열며 사각형으로 된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영어로 쓰인 화장품 세트였다. 옷가게를 하면서 미제 화장품을 같이 팔아보라는 것이었다. 마진이 아주 좋단다.
케이스를 보니 모두 영어로 씌어있었고 ‘Made in USA’라는 글자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 속에는 크림, 로션, 립스틱 등 10여 가지의 기초화장품이 들어있었는데 포장도 독특하고 멋이 있었다. 미군부대를 통해서 수입하는데, 요즘 신세대와 미시족들에게 인기가 좋아 없어서 못 판단다.
물건이 딸려서 한 구(區)에 한 군데 외에는 절대로 물건을 공급하지 않는단다. 한 세트의 소비자가격이 40만 원인데 12만 원에 공급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거래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꺼내놓은 화장품 한 세트를 서비스로 주겠다며 한 번 사용해보라고 했다. 크림 하나를 열어보니 참 좋은 것 같았다. 향도 좋고.
내가 망설이고 있자, 한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커다란 박스 두 개를 안고 들어왔다. 소비자가격으로 모두 800만 원어치인데 240만원을 받아야 하지만 200만 원에 주고 가겠단다. 오늘은 100만 원만 현금으로 내고, 나머지 100만 원은 한 달 후에 결재를 하란다.
화장품 진열대는 내일 나와서 무료로 설치해 준단다. 그때 대리점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된다면서 한 여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모두 영어로 씌어있었다. 주문할 때는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고 했다. 바로 다음날 갖다 준단다. 욕심이 났다. 4배 장사였다. 반값으로 할인해서 20만 원씩만 받아도 곱장사가 아닌가. 아동복보다 마진이 훨씬 좋다.
가진 돈은 30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이웃 슈퍼에 가서 급히 50만 원을 꾸었다. 내가 80만 원을 내놓자 처음에 옷을 샀던 여자가 나머지 20만 원은 옷으로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여자는 아이 옷을 몇 가지 더 골랐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그들이 돌아간 지 얼마 후, 아이 옷 사러 온 젊은 새댁에게 25만 원을 받기로 하고 화장품 케이스 하나를 뜯고서였다. 분명히 겉 케이스는 샘플과 같았으나 속의 내용물은 달랐다. 화장품 용기에 붙어있는 영문은 조잡하게 인쇄되어 있었고 내용물은 아무리 봐도 싸구려물품이었다. 다른 케이스를 뜯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차, 속았구나! 나는 부리나케 아까 받았던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녹음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호를 잘못 눌렀나 하고 또 다시 걸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거나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