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
최용현(수필가)
“이 작품을 처음 생각하게 된 동기는, 가수 김광석 씨가 자살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의 영정 사진이 활짝 웃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일상에는 고통도 있겠지만 밝은 부분도 있을 거 같았어요. 그런 밝음에 초점을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습니다.”
Q채널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이야기’ 프로의 ‘8월의 크리스마스’편에서 허진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멜로영화의 대가로 불리는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는 3년 후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한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다시 한 번 멜로영화의 거장(巨匠)으로서 진가를 발휘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 젊은 남자가 맞닥뜨리는 죽음의 과정을 고통과 비극이 아닌 담담한 일상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제목은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 따온 ‘즐거운 편지’로 정했다가,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한 ‘편지’(1997년)라는 영화가 있어서 ‘8월의 크리스마스’로 바꾸었다. 이것은 남녀주인공이 만나고 헤어지는 여름과 겨울을 하나로 잇는 표현인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에 발표한 동명의 수필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서울 관객 45만 3천명을 기록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98년 청룡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신인감독상(허진호), 여우주연상(심은하), 촬영상을 수상했고, 1999년 대종상영화제에서도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오승욱), 그리고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서울 변두리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아버지(신구 扮)를 모시고 사는 30대 중반의 노총각 정원(한석규 扮)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모든 것을 받아들인 그의 일상은 담담할 뿐이다. 중학생들이 몰려와서 좋아하는 여학생의 사진을 확대해 달라며 아우성치기도 하고, 대가족이 함께 와서 가족사진을 찍거나, 할머니가 혼자 와서 영정사진을 찍는 등 소박한 이웃들과 일상을 보내다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사는 것이다.
어느 여름 날, 20대 초반의 구청 소속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 扮)이 사진관에 들어오면서 평온했던 정원의 일상에 미묘한 동요가 생긴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사진관 앞을 지나면서 단속한 차량의 사진 필름을 맡기는 다림은 이 사진관의 단골이 되자, 사진관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아저씨, 왜 저만 보면 웃으세요?’ ‘왜 아직 결혼 안했어요?’ 하면서 질문 공세를 펼치기도 한다. 정원은 밝고 생기발랄한 그녀가 마냥 사랑스럽다.
그러나,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가 이제 막 청춘에 들어선 그녀와 긴 시간을 요하는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원은 그녀 때문에 삶에 집착하게 될까봐 두려워진다. 그런데, 밝고 씩씩하게 보이는 다림도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료함을 느끼다가 필름을 맡기기 위해 드나들던 사진관의 주인 정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어느 날, 정원은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 철구(이한위 扮)를 만나 함께 횟집에서 술을 마신다. 다시 포장마차에서 2차로 술을 마시다가 옆 사람과 시비가 붙어서 오게 된 파출소에서 옥신각신 설전이 벌어지자, 조용히 하라는 경찰관의 말에 정원은 ‘내가 왜 조용히 해야 해?’ 하면서 쌍욕을 섞어가며 울분을 토한다.
비오는 날, 다림은 오토바이 가게에서 스쿠터 수리를 맡기고 서있는 정원을 발견하고 정원과 함께 우산을 쓰고 사진관 앞까지 데려다준다. 며칠 후, 상태가 악화된 정원은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다림은 평소처럼 사진관에 찾아오는데, 계속 정원이 보이지 않자 편지를 써서 사진관 문틈에 끼워 넣는다. 며칠 후에도 사진관은 계속 닫혀있고 편지도 그대로 있자, 다림은 밤중에 찾아와 돌을 던져 사진관의 유리창을 깬다.
다림은 근무지역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발령이 나자, 정원을 생각하며 울적해한다. 정원 역시 입원실에 누워서 다림을 생각한다. 정원은 틈을 내어 사진관에 들렀다가 깨진 유리창을 보게 되고 다림의 편지도 읽게 된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다림이 자주 차를 단속하는 길목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그녀가 주차 단속을 하는 것을 창 너머에서 지켜본다. 사진관으로 돌아온 정원은 다림에게 답장을 쓴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
겨울이 되고, 정원이 세상을 떠난다. 다시 사진관을 맡게 된 정원의 아버지가 스쿠터를 타고 잠시 나간 사이에, 검은 코트 차림의 다림이 사진관으로 찾아온다. 사진관 문은 닫혀있지만, 그녀는 사진관 진열대 위에 놓인 자신의 사진을 보고 새침하게 미소 지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노총각이 죽기 얼마 전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느린 템포로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이다. 마지막 20여 분 동안은 아예 대사가 없다. 시한부 환자에 대한 자질구레한 감정들을 걷어내고 큰 줄기만 보여주는 쿨(cool)한 멜로라고나 할까.
이 영화는 대한민국 멜로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1998년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는 등 세계적으로도 199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2012년 5월에 시행된 수능 예비시험 국어영역의 지문(地文)에 나올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 이전 2000년대 초반에는 언어영역의 모의고사에도 나왔고, 2020년에는 수능특강 문학교재에도 수록되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정원의 독백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