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및 콩트

수학과 나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10

 수학(數學)과 나

 

최용현(수필가)

 

   한 인간이 출생,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16년이 소요된다. 유치원에 다니는 기간과 요즘 들어 부쩍 진학이 많아진 대학원 기간을 셈에 넣으면 교육을 받는 기간은 줄잡아 20년쯤 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가 자기 앞에 놓여진 20년간의 엄청난 학습량 앞에서도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20년 동안에 자신의 진로나 전공과목이 서서히 정해지겠으나 학창시절을 좌지우지하는 과목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영어와 수학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이면 알리라. 영어 쪽에 적성이 맞는 사람도 있고 수학 쪽에 적성이 맞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영어와 수학을 다 잘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영어와 수학이라는 두 수레바퀴 중에서 한쪽에 구멍이 생기면 치명적인 장해를 받게 된다.

   영어와 수학은 왜 해야 되는지. 과외까지 받아가며 꼭 해야 되는지. 십 수 년 동안 영어를 배워서 줄곧 높은 점수를 받아도, 미국사람보다도 문법을 더 잘 알아도, 미국사람 만나면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그러나 영어는 미국사람, 영국사람 언어이기 전에 세계어이니.

   수학은 어떤가. 더하기 빼기 구구셈 정도만 할 줄 알면 밥 먹고 사는 데 별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골 때리는 대수 기하 수열 함수 미적분을 중고등학교 때 꼭 해야 하는 건지.

   나의 전 학창생활을 통틀어 수학만큼 날 괴롭히고 주눅 들게 한 과목은 없었다. 내 학창시절과 그 후의 사회생활에서 겪어왔던 수학과의 투쟁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초등학교 입학, 일곱 살 때 동네에서 구슬치기를 하다 취학아동을 스카웃(?)하러 나온 선생님에게 잡혀서 학교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시골이라서 그런지 그땐 호적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지만 우리 반엔 열 살이 넘은 아이들도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땐 산수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읍내에 있는 M중학교에 지원했으면 무난히 합격했을 텐데 과욕을 좀 부렸었다. 그때 공부 잘하던 몇몇 친구들이 서울, 부산, 대구로 원정 가는 바람에 나도 그 속에 끼어 부산 G중학교에 지원했다. 각 과목마다 20문제씩 출제되었는데 사회와 음악은 만점을 받았지만 산수에서 여덟 개나 틀렸다.

   재수를 했다. 7학년. 대도시로 갔던 우물안개구리들이 모두 떨어지는 바람에 7학년이 무더기로 생겼다. 일 년 후 다시 그 학교에 시험 보러 갔으나 또 떨어졌다. 산수 성적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후기 때 변두리 시골 중학교에 들어가서 몇 달 다니다가 M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중학교 때는 수학성적이 평균치를 좀 밑돌 정도였다. 그런데 2학년 때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딱 한 번 수학에서 100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형문제만 나왔을 때였다. 우리 반에서 유일한 점수였고, 수학에서의 내 전무후무했던 찬란한 기록이었다. 그해 성적표 통신란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이 학생은 수학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이 방면으로.’(선생님, 너무하셨어요.)

   고등학교 입시에서도 떨어졌다. 물론 수학 때문이었다. 후기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1,2학년 때도 수학성적은 중간치를 약간 밑돌 정도였다. 수학책은 점점 보기가 싫어졌다.

   고3이 되었다. 전체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수학이 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한 문제에 20, 30점씩 하는 큰 문제들이 날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3월 첫 시험에서 30점이 나오더니 다음 달엔 20, 그 다음 달에는 10, 6월인가에 드디어 0점이 나왔다.

   수학을 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섰다. 나는 수학을 포기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아울러 죽어도 하기 싫었던 물리화학생물도 과감히 포기하고 지학만 하기로 했다. 영어국어일반사회국사지학만 해서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르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예비고사를 통과한 나는 그해 대학입시에서 과학 네 과목이 필수인 P대를 포기하고 과학 네 과목 중 한 과목만 선택할 수 있는 K대 법대에 응시했다. 필수과목인 수학이 어렵게 나오기를 빌면서. 수학이 쉬우면 난 망하는 거였다. 수학시험 시간에 5점짜리 인수분해 문제만 몇 문제 풀고 나왔다. 100점 만점에 15점은 나올 것 같았다. 수학이 쉬웠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불합격을 확신했다.

   단식투쟁 이틀 만에, 후기 응시를 종용하는 아버지에게서 재수 허락을 받아냈다. 부산에서 학원 종합반에 들어갔다. 수학은 이미 완전히 물 건너간 상태였다. 또다시 영어국어일반사회국사지학만으로 예비고사를 보기로 했다. 그해는 예비고사도 겁이 났다.

   예비고사를 통과하고 나니 이제 정말 수학이 무서워졌다. 수학시험을 치지 않는 대학을 백방으로 찾았다. 마침 그해에 서울에 있는 K대가 후기에서 전기로 바뀌었다. 문과계열은 수학과 일반사회 중에서 한 과목 선택이었다. ! 살았다. 법대 행정학과에 원서를 냈다. 경쟁률은 9.61이었지만 자신이 있었다. 합격자 발표 때는 혹시나 하고 장학생 명단을 기웃거려보는 호기(豪氣)까지 부렸다.

   드디어 나는 십 수 년에 걸친 수학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OO보험회사에 들어갔다. 본사 교육부에서 교재편집을 해오다 3년 후 대리로 승진되면서 일선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숫자놀음이었다. 그놈의 숫자들이 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계산머리가 팍팍 돌아가야 하는데 도대체 숫자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공칭계약고, 환산계약고, 국민생명표, 수당지급률, 보험요율.

   한 달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몇 년 놀다가 다시 대한전기학회에 들어갔다. 傳記(biography)인지 電氣(electricity)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후자였다. 편집 일을 하는데 웬 수식과 부호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고등학교 때 골머리를 앓다 포기하고 말았던 바로 그 수학 때문에 다시 뒷골이 지끈지끈해지기 시작했다. 4년 만에 사표를 냈다.

   좀 놀다가 다시 전력전자학회에 들어왔다. 또다시 그 수식 부호들과 시름하고 있다. α, β, γ, log, sin, cos, ω, θ, φ, x, , , ∑….

   아! 수학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