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공동묘지
월하의 공동묘지
최용현(수필가)
자전거를 타고 20리가 넘는 등굣길을 오가던 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읍내 극장에 소복차림의 산발(散髮)한 여자귀신이 입에 피를 흘리며 노려보는 간판그림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그 순간, 열세 살 소년을 오싹한 공포감에 휩싸이게 했던 ‘월하의 공동묘지’는 내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영화를 본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듯 흉측한 얼굴의 변사가 나와서 해설을 한다. 음산한 달빛 아래 공동묘지에서 한 무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소복을 입은 월향(강미애 扮)의 원귀(冤鬼)가 나타난다. 그 시간, 월향의 집에서는 찬모(饌母)였다가 안방을 차지한 난주(도금봉 扮)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어미(정애란 扮)가 월향의 어린 아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나가는데, 곧바로 월향(?)이 나타나 젖을 물리면서 아기는 다시 살아난다.
5년 전, 독립운동가의 딸인 명순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끌려가 투옥된 오빠 춘식(황해 扮)과 애인 한수(박노식 扮)의 옥바라지를 위해 돈을 벌려고 이름을 월향으로 바꾸고 기생이 된다. 춘식은 고생하는 여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신이 혼자 죄를 다 뒤집어쓰고 친구이면서 매부(妹夫)가 될 한수를 풀려나게 한다.
석방된 한수는 월향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다. 장안의 갑부가 된 한수는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춘식은 몇 번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무기수(無期囚)가 된다. 월향은 오빠 때문에 고심하다가 병에 걸려 아랫방에서 누워 지낸다. 그러자 난주는 안방을 차지하기 위해 가짜의사(허장강 扮)와 짜고 월향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기 시작한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귀가한 한수는 난주의 유혹에 넘어가 동침하게 되고, 때마침 탈옥에 성공한 춘식이 집에 찾아온다. 딴 여자와 동침하고 있던 한수와 병색이 완연한 여동생을 보고 춘식은 분노하지만, 월향은 자신 탓이라며 남편을 감싸준다. 이때 호각소리가 나자, 춘식은 동생을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하고 황급히 집을 빠져나간다.
안방을 차지한 난주는 다시 음모를 꾸민다. 한밤중에, 수면제를 먹여 잠에 곯아떨어진 월향의 방에 돈으로 매수한 남자를 들어갔다가 나오게 하는데, 이를 알게 된 한수는 아내가 외간남자를 끌어들였다며 기생전력까지 들먹이면서 구타한다. 억울한 누명에 괴로워하던 월향은 어린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다.
가짜의사와 함께 그 외간남자를 죽인 난주는 한수마저 없애버리고 이 집 재산을 가로채 달아날 계략을 꾸민다. 난주는 한수가 탈옥한 춘식과 내통하고 있다고 경찰에 밀고하는데, 이로 인해 한수는 일본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난주는 어미를 시켜서 다시 월향의 어린 아들을 죽이려 한다. 이때 월향의 원귀가 나타나 계속 쫓아오자, 난주의 어미는 미쳐 날뛰다가 우물에 빠져죽는다. 밤새 원귀에 시달리던 난주는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데 대문 앞에서 역시 원귀에 쫓기던 가짜의사와 마주친다. 그는 ‘왜 혼자 도망치느냐’며 난주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난주는 그를 칼로 찌르는데, 둘 다 끔찍하게 횡사(橫死)한다.
그날 밤, 춘식이 ‘경주이씨월향지묘’라고 쓴 나무비석을 가지고 와서 월향의 무덤 앞에 세운다. 곧이어 한수가 아들을 안고 무덤에 찾아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보고, 춘식은 쓸쓸히 도피의 길을 떠난다. 다시 무덤이 갈라지고 월향의 원귀가 승천(昇天)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권철휘 감독의 1967년 작 ‘월하의 공동묘지’는 억울하게 죽은 여인이 원귀가 되어 복수극을 펼치는 호러물로, 우리나라 공포영화의 전형(典型)이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제목인 ‘기생월향지묘’가 너무 고리타분해서 ‘월하의 공동묘지’라는 새 제목을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의표를 찌르는 놀라운 작명이다. 오래오래 기억될만한 제목이다.
두 여주인공의 상반되는 캐릭터가 단연 돋보인다. 단아한 미모의 강미애는 여리고 다소곳한 성정(性情)이지만, 귀신이 되어서는 강인하고 억척스런 모성을 발휘하여 어린 자식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한다. 반면에 육감적인 미모의 도금봉은 과도한 욕심으로 한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악녀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하면서 영화를 끝까지 드라마틱하게 이끌어간다.
60년대 영화라서 더러는 조잡한 티가 나지만, 원귀출몰 때의 재빠른 장면전환과 여러 가지 특수음향, 그리고 고양이와 해골, 날아다니는 등불 등 소품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다양한 영화적 기법과 미장센으로 공포심을 자극하고 있는 점은 돋보이는 연출이다.
초장에 무덤이 갈라지면서 월향의 원귀가 등장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또 파장(罷場)에 가짜의사가 뿌린 염산으로 인해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죽는 난주의 모습도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중반에 오누이가 서로 끌어안고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식의 신파조 같은 대사를 하는 것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한을 품고 죽은 여자가 원귀가 되어 복수하는 우리나라 호러물의 계보는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시작되어 ‘여곡성(女哭聲, 1986년)’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여고괴담’(1998년) 시리즈도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무대가 가정에서 학원으로 바뀌었을 뿐 맥락은 거의 같다. 그 후에 나온 ‘알 포인트’(2004년)나 ‘곡성’(2016년)은 전혀 다른 성격의 호러물이다.
2017년 12월, ‘월하의 공동묘지’가 나온 지 50년 만에 리메이크 작 ‘월하’가 개봉되었으나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예전에는 귀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으나, 요즘은 아무도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된지 이미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