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세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

월산처사, 따오기 2020. 2. 28. 21:52

죽음의 다섯 손가락(鐵人)

최용현(수필가)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년)은 정통검술영화에서 현대액션영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시작을 알리는 권격(拳擊)영화로, 감독은 한국인, 주인공은 홍콩인, 조연들은 한국배우와 홍콩배우가 골고루 안배된 한국홍콩 합작품이다. 그러나 홍콩쇼브라더스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홍콩영화 내지는 중국영화로 분류된다.

   이 영화는 1973년에 미국에서 동시 개봉한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년)와 재개봉한 ‘사운드 오브 뮤직’(1965년)을 제치고 홍콩영화 최초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기염을 토했고, 그 해 전미 흥행 10위권에 들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에서는 이 영화를 미국의 쿵푸영화 열기에 불을 지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 영화는 많은 제목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창화 감독이 생각한 영화 제목은 ‘철장(鐵掌)’이었으나,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 우리나라에서는 ‘철인(鐵人)’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또 미국에서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 유럽에서는 ‘킹 복서(King Boxer)’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고아출신 지호(로례 扮)는 송무량의 무예지도를 받으며 성장했고, 그의 딸 영영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어느 날, 손사부(방면 扮)에게 무예를 배우고 있는 옛 동료 대명(진봉진 扮)이 찾아오자, 지호와 대명은 무예 대련(對鍊)을 펼친다.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송무량은 지호를 손사부에게 보내기로 한다.

   손사부가 있는 상무국술관은 체계적으로 무도(武道)를 가르치는 곳으로, 대명 외에도 한룡(남석훈 扮)이라는 고수가 있다. 반면에 맹사부(전풍 扮)가 있는 백승무관은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곳으로, 맹사부의 아들 맹천웅(동림 扮)과 박치기의 명수 진랑(김기주 扮) 등의 고수가 있다. 최근에는 일본 가라테 고수인 사무라이 3명을 고용하였다.

   손사부가 지호에게 본격적으로 무예지도를 하자, 지호는 놀라운 속도로 진전을 보인다. 그러자 손사부는 지호가 철사장(鐵砂掌)을 습득할 수 있도록 비기(秘記)를 넘겨준다. 이것은 뜨겁게 달군 모래 속에 두 손을 집어넣어 수도(手刀)를 단련하는 것으로, 철사장를 익힌 지호는 사형 한룡을 꺾고 상무국술관의 대표로 국술대회 출전권을 획득한다.

   한편, 백승무관의 개망나니 맹천웅은 사무라이들을 앞세워 자신이 국술대회에서 우승하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무예고수들을 처단하려 하고 있다. 그때 마침 한룡이 찾아와 손사부로부터 철사장을 전수받지 못해 국술대회 선발전에서 후배에게 패했다며 함께 지호를 해칠 계략을 꾸민다.

   맹천웅은 사무라이들과 함께 먼저 송무량을 찾아가 죽이고, 지호를 숲속으로 유인하여 포박한 후 철사장을 쓰지 못하게 그의 두 손을 짓이겨버린다. 그러나 전에 위급할 때 구해준 적이 있는 언 낭자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지호의 망가진 손은 거의 회복된다. 지호가 국술대회에 출전하려고 집을 나서자, 맹사부의 밀명을 받은 사무라이들이 길목을 막아선다.

   격투 끝에 지호가 사무라이 두 명을 처치하지만 아직 고수가 남아있다. 이때 박치기 고수 진랑(김기주 분)이 나타나 맹사부 부자(父子)의 악행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며 자신이 사무라이 고수를 상대할 테니 속히 가서 대회에 출전하라고 한다. 가까스로 제 시간에 도착한 지호는 마침내 결승에서 맹천웅을 때려눕히고 국술대회에서 우승한다.

   지호는 국술대회장에 찾아온 송무량의 딸 영영으로부터 아버지가 맹천웅과 사무라이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때 관중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뜨면서 어수선해진 틈을 타 맹사부가 축하하는 척하며 단검을 내질러 손사부를 살해한다. 지호는 분개하며 사부들의 복수를 다짐한다.

   맹사부에게 이용당하고 두 눈알까지 뽑힌 한룡은 언 낭자와 함께 복수하러 갔다가 맹사부에게 피살되는데, 이때 지호가 찾아와 치열한 접전 끝에 맹사부를 처치한다. 그러자 사무라이 고수가 진랑의 수급(首級)을 들고 앞을 막아선다. 지호는 칼을 빼든 사무라이 고수마저 철사장으로 처치하고 연인 영영, 옛 동료 대명과 함께 그곳을 떠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는 홍콩영화 최초로 세계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작품으로, 무예고수들의 성장과 배신, 개심(改心), 복수의 이야기가 빈틈없는 짜임새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명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에 꼽았고, 우마 서먼 주연의 ‘킬 빌’(2003년)에서 오마주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2005년에는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초청되면서 불후의 명작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영화가 세계적인 각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했고, 관객도 기대만큼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홍합작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제목으로 정한 ‘철인’이 임팩트가 약한데다, 당시 유신을 시작한 군사정권의 엄격한 검열을 의식하여 수입회사에서 내용을 멋대로 재편집을 한 탓도 있다고 한다.

   주인공 로례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미남배우로 여러 홍콩무협영화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 왕우와 함께 공연했고, ‘철수무정’(1969년) ‘아랑곡의 혈투’(1970년) ‘옥중도’(1971년) 등에서는 단독주연을 맡아 전성기를 구가했다. 후에 한국에도 진출했으나 2002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정창화 감독(1928~ )은 제1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장편부문 심사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촬영할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와이어액션이 생각보다 느리기 때문에 트램펄린을 써서 속도감을 살렸고, 마룻바닥에 파우더를 뿌려서 공중에서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질 때 하얀 먼지를 일으켜서 박진감을 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