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세이

페드라

월산처사, 따오기 2020. 2. 15. 11:26

페드라(Phaedra)

 

최용현(수필가)

 

   ‘페드라(Phaedra)’는 미국의 줄스 다신 감독이 1962년에 만든 흑백영화로, 그리스신화를 모티브로 의붓어머니와 전처소생 아들간의 금단(禁斷)의 사랑과 비극적인 종말을 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에서 음악을 맡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의 민족음악가로, OST인 ‘Agapi Mou(내 사랑)’를 작곡하고 직접 노래도 불렀다. 좌익이라는 이유로 군사정권 아래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저 유명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옥중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그리스신화를 보자.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에게는 ‘파이드라’라는 예쁜 딸이 있었다. 성장한 파이드라 공주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데, 파이드라는 전처소생의 아들 히폴리투스를 사랑하게 된다. 히폴리투스가 계모인 파이드라의 구애를 거절하자 그녀의 사랑은 증오로 변한다. 파이드라는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범했다고 모함하는 편지를 써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추방된 히폴리투스는 이륜마차를 타고 해안길을 달리다가 마차에서 떨어져 죽는다.

   해운업계의 떠오르는 실력자 타노스(라프 발로네 扮)는 그리스 선박왕의 딸인 미모의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 扮)와 재혼을 하고, 이어 페드라호로 명명한 새 선박의 진수식을 거행한다. 타노스는 런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전처소생의 아들 알렉시스(안소니 퍼킨스 扮)를 파리로 데려오도록 페드라에게 부탁한다. 런던에서 처음 만난 페드라와 알렉시스는 서로 첫눈에 반한다. 파리에서 아들과 잠시 만난 타노스는 뉴욕으로 출장을 떠난다.

   밤비 내리는 파리의 호텔에 남겨진 젊은 두 모자(母子)는 걷잡을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만다. 다음 날도 이들은 연인처럼 붙어 다니며 열정을 불태운다. 페드라를 첫사랑이라고 고백한 알렉시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갈 때쯤,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알렉시스를 잊기로 결심한 페드라는 알렉시스에게 여름방학 때 절대로 그리스 집으로 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그리스로 돌아온 페드라는 알렉시스를 그리워하며 남편의 손길마저 거부한다. 페드라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유모에게 ‘아프다.’ ‘죽고 싶다.’고 하면서 알렉시스를 향한 치정(癡情)의 열병을 토로한다.

   여름방학이 되자, 타노스는 알렉시스가 갖고 싶어 하던 스포츠카를 사놓고 알렉시스를 그리스로 부른다. 타노스는 파티를 열어 알렉시스를 처형의 딸과 짝 지워주면서 둘을 결혼시켜서 선박왕의 계보를 이어가게 할 생각을 밝힌다. 페드라는 질투심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략결혼을 추진하는 양가 가족들 모두 폭삭 망할 것이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래서일까? 첫 장면에서 성대하게 진수식을 한 페드라호가 노르웨이 연안에서 난파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사고가 일어난다. 페드라는 사고수습을 하는 타노스의 사무실로 찾아가 알렉시스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알렉시스를 사랑한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분노한 타노스는 알렉시스를 마구 두들겨 팬 후, 그리스에서 사라지라고 말한다.

   집에 돌아온 알렉시스가 수돗가에서 얼굴의 상처를 씻자, 페드라가 다가와 알렉시스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한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다시는 그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난 이제 겨우 24살인데….’ 하고 차갑게 말하고 차를 몰고 사라진다.

   영화 ‘페드라’는 그리스신화 파이드라의 현대적 변주(變奏)이다. 해운업계의 실력자 타노스는 신화 속의 영웅인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이고, 페드라는 이름 그대로 파이드라이다. 알렉시스는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투스이고, 알렉시스의 스포츠카는 히폴리투스의 이륜마차와 다름이 없다.

   페드라 역을 맡은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의 국민배우이자 가수로 이 영화를 감독한 줄스 다신과 재혼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사정권 때 미국과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군사정권이 끝난 후 귀국하여 국회의원과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타노스 역의 라프 발로네는 50년대 이탈리아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배우로 이탈리아의 버트 랭카스터로 불렸다. 실바나 망가노와 공연한 ‘애정의 쌀’(1949)로 스타덤에 올랐고, 60년대 이후에는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알렉시스 역을 맡은 안소니 퍼킨스는 ‘우정 있는 설복’(1956)과 ‘싸이코’(1960)에서 열연한 미국배우로, 60세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은 2001년 9·11 테러 때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에 탑승했다가 숨졌다고 한다.

   자, 이제 이 영화의 결말을 보자. 알렉시스는 자신의 차를 몰고 해안산길을 고속으로 질주한다. 볼륨을 크게 올린 라디오에서 바흐의 파이프 오르간 음악 ‘토카타와 푸가(Toccatas & Fugues)’가 울려 퍼진다. 알렉시스는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절규하듯 소리를 지르다가 앞에서 오는 트럭을 피하지 못해 차와 함께 에게해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굿 바이, 페드라. 그녀는 날 사랑했어. 죽고 싶어. 이제 24살….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오, 페드라! 페드라~!

 

   한편, 타노스는 몰려든 유족들 앞에서 페드라호의 사망자 명단을 호명하고 있고, 페드라는 침실에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시간, 알렉시스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들것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